한겨레, 넘어진 이 자리에서 2 [권태호의 저널리즘책무실]

권태호 2023. 2. 13.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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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책무실]

지난 1월31일 한겨레신문사 8층 회의실에서 열린편집위원회가 열리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편집국 간부와 김만배씨의 돈거래와 관련된 사안이 논의됐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권태호 ㅣ 저널리즘책무실장 겸 논설위원

한겨레 편집국 간부와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의 돈거래 사실이 드러난 이후, 참담함 속에 또 다른 고민 가운데 하나가 ‘이제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을까, 더 이상 어떻게 저널리즘을 논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2.5주 만에 돌아온 이번 칼럼에는 되도록이면 그 사건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또 ‘그 사안을 제외하고, 무슨 저널리즘을 이야기할 건가’라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음을 스스로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최종 진상조사 보고서가 나오기 전까지 중간 과정을 계속 독자·시민들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겨레신문 ‘편집국 간부의 김만배 사건 관련 진상조사위원회’는 지난 1월11일 첫 회의를 시작으로 한달 넘게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사외 위원 4명을 포함해 모두 13명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는 그동안 대표이사부터 편집인, 편집국장, 국장단 등 이 사건과 관련한 지휘책임 계통상에 있는 이들과 사회부장, 전·현직 법조팀장, 전·현직 법조팀 기자들, 전·현직 에디터 및 데스크 등 사내 인사 대면조사, 변호인을 통한 김만배씨 서면조사, 관련된 다른 언론사 기자와의 전화통화 등 광범위하게 조사를 벌여왔습니다. 또 김만배씨와 돈거래를 한 해고 간부에 대해서도 서면조사와 대면조사를 병행했습니다.

조사는 거의 마무리됐으며, 현재 보고서 초안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공정성, 투명성,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사외 인사를 위원장으로 선임하고, 미디어 전문가, 변호사 등을 사외 위원으로 위촉한 취지에 맞게 ‘진상조사 보고서’도 사내용이 아닌, 주주·독자·시민들에게 공개하는 형태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일부 사안은 공개에 부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투명성은 주주·독자·시민들이 입은 상처에 한겨레가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장기적으로는 한겨레는 물론 전체 언론에도 최소한의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도 없진 않습니다.

보고서는 크게 △한겨레 간부와 김만배씨의 돈거래 내역과 배경 △2022년 3월 사내 인사 인지 과정 △2023년 1월5일 이후 사내 대응 과정 △대장동 기사에 미친 영향 여부 등으로 구분돼 설명드리게 될 것입니다.

조사와 보고서 작업을 진행하며 이는 몇가지 의문점 중 하나는 이 사건이 ‘개인 일탈 문제’인가, ‘구조적 문제’인가 하는 점입니다. 정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개인 일탈 문제에서만 비롯됐다면, 한겨레는 해당 간부를 해고했으니 도려낸 것으로 문제는 끝난 것일 수 있습니다.

한겨레가 외부 인사를 포함한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광범위한 조사를 벌이고, 공개용 보고서를 만들기로 한 것은 이 사건을 ‘구조적 문제’로 봤기 때문입니다.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 단순히 ‘너희 모두 다 죄인’이라는 식의 연대책임을 강조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한겨레의 어떤 점이 핵심 간부로 하여금 그러한 행동에 이르게 하였는가 하는 점은 짚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이 사실을 처음 들은 주무부서 부장이 10개월가량 이를 회사에 보고하지 않은 점에도 한겨레의 어떤 문화와 인식이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법조기자단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만배씨는 법조기자실을 바탕으로 주변 일부 기자들에게 금품이나 접대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갔고, 또 이를 사업상 ‘로비 자금’이라며 천화동인 쪽에 요구해 경제적 이득까지 취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겨레 간부와의 돈거래도 그 연장선입니다. 따라서 김만배씨가 입지를 굳혀나갈 수 있었던 법조기자실 구조의 문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한겨레신문 차원이 아닌, 한국 언론이 함께 고민하고 풀어나가야 할 숙제에 가깝습니다.

이 사건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던 지난 1월31일 한겨레에서는 정년퇴임식이 열려 3명의 선배들이 후배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 자리에서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때에 교열기자로 입사한 김인숙 선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일어 사전을 만드는 회사에 있다가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습니다. 한겨레신문이 나를 뽑아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에 다닐 수 있다면, 문지기라도 하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30여년간 교열부에서 근무하면서 오자를 낸 채 신문이 인쇄되는 날이 생기면, 자책감에 밤잠을 못 잤습니다. 오랫동안 회사를 다녔는데 더 나은 회사, 그리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지 못하고, 후배들에게 짐을 넘기고 떠나게 돼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 사회의 고민을 시민들과 함께 풀어나가야 할 한겨레가 오히려 이 사회에 고민을 던져준 데 대해 주주·독자·시민들에게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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