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가 된 공원…깊게 파인 도랑에 슬픔을 묻다[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현장을 가다]

김서영 기자 2023. 2. 13. 21:2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튀르키예 카라만마라슈 매장지

묘비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널빤지 위에는 검정 매직으로 쓴 묘비 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다.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급하게 쓴 것 같았다. 같은 성을 가진 묘비들이 나란히 눈에 띄었다. 일가족으로 추정된다. 튀르키예 정부가 선포한 국가 애도기간은 13일(현지시간)로 종료됐지만, 가장 비참하고 황망하게 가족을 떠나보내야 하는 유족들의 애도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해가 막 떠오른 이날 오전 8시쯤 픽업트럭 한 대가 튀르키예 카라만마라슈에서 남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교외의 한 공터에 멈춰섰다. 트럭 짐칸에서 가방에 담긴 3구의 시신과 유족들이 내렸다. 성인 남성 7명이 양쪽과 앞쪽에 나뉘어 서서 운구했다.

시신이 향한 곳은 ‘무덤’이 아닌 도랑이었다. 포클레인이 허벅지 깊이 정도로 판 도랑 안에 시신 가방이 하나둘 일렬로 놓이기 시작했다.

도랑 옆에 선 이슬람 성직자는 “신께 기도 올린다”며 간이 장례 절차를 집행했고, 주변에 앉은 유족들은 두 손을 모으고 매장 과정을 지켜봤다. 고인이 안치된 곳 위로 포클레인이 자갈 섞인 흙을 뿌렸다. 이제 막 덮어서 물기가 남아 있는 흙은 주변보다 어두운 갈색빛을 띠었다. 얕게 쌓은 봉분 위로 포클레인이 널빤지 묘비를 꾹 눌러 박았다.

이 곳은 본래 공동묘지가 아니고 넓은 공원 부지였다. 바로 맞닿은 카피참 국유림을 끼고 도로변으로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조성돼 있고, 맞은편에는 눈 덮인 산이 보였다. 푸른 밭과 목장이 펼쳐진, 그림 같은 전원 풍경을 품은 곳이다. 그러나 지난 6일 이후 이곳은 튀르키예의 슬픔이 잠드는 공간이 됐다.

밀려드는 시신·끝없는 매장…아직은 ‘잠들 수 없는 묘지’
살아남은 이들의 상처는 도랑보다 깊었다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8일째인 13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카라만마라슈 교외의 한 공터에서 유가족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지진 희생자들을 매장하고 있다. 카라만마라슈(튀르키예) | 문재원 기자

“2시간여 만에 150구 도착…하루종일 쉴새 없이 묘지 터 파내”
주차장, 신원미상 시신 안치소로…당국 “발견 5일 이내 매장”

지진 발생 후 일주일이 흐르는 동안 튀르키예의 사망자만 3만2000명에 육박하고 있다. 그 많은 희생자들을 수습하기 위해 튀르키예 정부는 집단 매장을 시행하고 있다.

이날 찾은 카라만마라슈 매장지에는 길이가 다양한 도랑이 비탈진 경사면에 수도 없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포클레인 여러 대가 새로운 도랑을 파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지난 6일 강진 이후 끊임없이 시신이 들어와 24시간 매장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잔해 제거 작업이 진행되면서 더 많은 시신이 수습되고 있는 터라 이제는 집단 매장지조차 공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멜리 카잔시는 이번 지진으로 숨진 시부모를 나란히 안장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고 워싱턴포스트(WP)에 말했다. 소나무 숲 가장자리에 파인 도랑에 시어머니를 묻은 바로 다음날 시아버지의 시신을 운구해 왔지만 그사이 시어머니가 묻힌 도랑은 다른 시신으로 가득 차 버렸고, 각각 수십개의 무덤이 들어선 여섯개의 도랑이 새로 만들어져 있었다. 카이세리에서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는 트럭운전 기사 오누르 얄킨도 “2시간30분가량 묘지에 머무는 동안 약 150구의 시신이 도착한 것 같다”고 WP에 말했다.

튀르키예는 통상 봉분이나 석관에 고인을 안치한다. 하지만 이날 카라만카라슈 교외 매장지에서는 관 대신 자갈이 한쪽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이 관계자는 “비가 오면 도랑 안의 시신들이 떠내려 갈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려고 자갈을 섞고 있다”며 “정부가 제공한 자갈인데, 원래는 공사용 자갈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m 간격으로 다닥다닥 붙은 널빤지 묘비에는 잔해 더미 아래서 추위에 떨었을 희생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듯 목도리가 둘러져 있거나 비닐이 덮여 있었다. 어린 조카 둘을 잃은 한 남성은 “신이 우리를 세상에 데리고 왔듯이 다시 거둬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제대로 된 묘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현 상황을 두고 “이것저것 잴 겨를이 없는 상황”이라며 “지금은 무엇보다 (숨진 이들을) 얼른 눕혀 줘야 한다”고 말했다.

튀르키예 하타이주 안타키아 외곽의 집단 묘지에도 묘지가 문을 연 지난 10일부터 다음날 정오까지 2000구가 넘는 희생자 시신이 안치됐다.

강진 피해가 극심한 시리아 북서부 지역도 상황은 비슷하다. 알레포주 잔다리스 지역의 한 공동묘지는 매일 들어오는 수백구의 시신들로 가득 찼다. 한쪽에선 매장이 이뤄지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매장지를 만들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알자지라는 구덩이를 파기 위해 잔다리스 전역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참사 지역 곳곳의 야외 주차장들은 생존자들이 가족들의 시신을 식별할 수 있는 임시 시신안치소로 변했다. 신원 미상의 시신들이 모여든 임시 안치소에는 가족을 찾으려는 생존자들이 몰려들어 시신가방을 하나하나 일일이 열어보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보도했다. 튀르키예 내무부 산하 재난관리국은 이날 “앞으로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도 발견 5일 이내에 매장 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날로 지난 7일 튀르키예 정부가 선포한 일주일간의 국가 애도기간은 종료됐다. 그동안 지진 피해 현장 인근 도시에서는 음식점이 일제히 문을 닫고, 시내 모스크 앞에는 조기가 게양됐다. 그러나 튀르키예에서 진정한 애도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주민들은 방진 검사를 통과한 최신식 건물들이 왜 그리 쉽게 바스라져버린 것인지, 구조대는 왜 오지 않은 것인지, 가족들은 왜 잔해 밑에 갇혀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것인지 정부에 묻고 있다.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속 상처가 이날 파인 도랑보다도 길고 깊어 보였다. 기자가 떠나는 순간에도 카라만마라슈 남부 집단 매장지에는 포클레인을 따라 새로운 상처가 죽죽 그어지고 있었다.

카라만마라슈 |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