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총을 통해 본 비극적 현대사 빈틈없는 짜임새… 3시간 훌쩍

이강은 2023. 2. 13.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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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물간 40대 여성 드라마작가 '나나'(이진희·정운선)가 한 영화 소품 창고에 갔다가 낡고 긴 장총 한 자루에 시선이 꽂힌다.

애가 탄 나나가 애원하듯 "날 한 번만 믿고 이야기 좀 해달라"고 귀찮을 정도로 조르자 장총을 의인화한 빵야가 힘겹게 말한다.

이 장총에 대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상징하는 참담하고 비극적인 몸체"라고 한 김은성 작가의 설명이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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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빵야’ 리뷰
한물간 40대 여성 드라마작가 ‘나나’(이진희·정운선)가 한 영화 소품 창고에 갔다가 낡고 긴 장총 한 자루에 시선이 꽂힌다. 소진된 창작열을 되살려 미니시리즈 드라마 편성 계약도 따낼 수 있게 제대로 된 글감이 돼 줄 것만 같아서다. 나나는 장총을 들고 와 책상 앞에 앉지만 도무지 작품이 써지지 않는다. ‘빵야(사진)’(문태유·하성광)라고 이름까지 지어준 장총이 입을 꾹 다물었기 때문이다. 애가 탄 나나가 애원하듯 “날 한 번만 믿고 이야기 좀 해달라”고 귀찮을 정도로 조르자 장총을 의인화한 빵야가 힘겹게 말한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나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빵야의 일생이 한국의 참혹했던 현대사를 관통하며 처절하게 펼쳐진다.

연극 ‘빵야’(김은성 작·김태형 연출)는 이처럼 장총 빵야의 삶과 그 이야기가 드라마로 제작되게끔 고군분투하는 나나의 삶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극 중 빵야는 일본 제국주의 주력 소총으로 1945년 2월 인천 조병창 제3공장에서 77020번째로 만들어진 아리사카 99식 장총이다. 이후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조선 독립군 토벌을 시작으로, 제주 4·3사건, 한국전쟁, 지리산 빨치산 토벌 등 끔찍한 살육 현장을 마주한 뒤 전쟁 영화 제작용 소품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된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출신 일본 관동군 장교부터 중국 팔로군, 국방경비대, 서북청년단, 빨치산 소녀, 지리산 심마니, 건설업자, 영화 제작자 등 빵야의 주인이 10여차례 바뀌게 된 사연은 우리의 현대사의 질곡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장총에 대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상징하는 참담하고 비극적인 몸체”라고 한 김은성 작가의 설명이 와닿는다.

그렇다고 극이 시종일관 어둡고 무겁게만 흐르지 않는다. 이야기의 또 다른 축으로, 나나를 통해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유쾌한 장면도 많이 나온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2 공연예술창작산실―올해의 신작’에 뽑힐 만큼 작품성이 뛰어나고 관객을 울렸다 웃겼다 한다. 1인 다역을 소화하는 조연 배우들의 열연과 3시간 가까운 공연시간 내내 지루할 틈이 없게 한 연출도 돋보인다.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U+ 스테이지에서 오는 26일까지.

이강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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