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관리 주체는 정부도 전문기관도 아니다

한겨레 2023. 2. 1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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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

지난해 10월15일 노동자 끼임 사망 사고가 발생한 에스피씨(SPC) 계열 에스피엘(SPL) 경기도 평택공장에서 직원들이 일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한 기계에 흰 천이 덮여 있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제공

[왜냐면] 임영섭 | 재단법인 피플 미래일터연구원장

한국 산업안전보건법 제93조는 프레스 등 위험한 기계에 대해 ‘고용노동부 장관이 실시’하는 안전검사를 받도록 정하고 있다. 실제 검사는 고용노동부가 지정한 전문기관에서 위탁 수행한다.

영국 작업장비규칙(PUWER) 제6조는 ‘사업주’가 작업 장비에 대한 검사를 하도록 정하고 있다. 검사가 필요한지 어떤 주기로 할 것인지는 위험성 평가를 통해 사업주가 결정하도록 하고, 검사는 사업장의 역량 있는 자가 하면 된다. 필요하면 산업별 협회, 컨설턴트 등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두 나라의 안전검사 제도의 차이는 안전관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장관이 안전검사의 주체이면 사업주는 검사를 받는 객체일 뿐이다. 안전검사는 통과해야 하는 규제로 인식된다. 검사를 깐깐하게 하는 검사기관은 환영받지 못한다. 무엇보다 사고가 나면 정부 탓, 검사기관 탓으로 돌린다. 법령에서 정해진 대로 검사를 받았고 검사는 검사기관 즉 정부에서 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에스피엘(SPL) 사업장에서 작업자가 빵 재료를 혼합하는 기계에 끼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안전보건경영인증이 도마 위에 올랐었다. 해당 교반기에 안전장치가 설치되지 않았는데 인증기관이 이를 확인하고 개선토록 조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증기관이 안전관리의 주체인 양….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논란도 그 근저에는 안전관리의 주체가 정부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경영책임자가 지켜야 할 사항을 정부가 구체적으로 정해달라는 것이다. 현장에서 안전보건조치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갖추라는 법 취지를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이 법은 안전확보의 주체인 경영책임자가 필요한 예산이나 인력에 대해 결정하고 그 적절성에 대해 책임을 지는 구조다. 이를 고려하면 시행령이 정하고 있는 14개 의무조항은 오히려 경영책임자의 주체적 결정권을 침범하고 있다고 본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년의 성과에 대한 시각도 문제다. 사망자 수 감소가 기대에 못 미치자 경영계를 중심으로 ‘거봐라’식의 비판과 함께 예방법을 되도록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다. 사망사고가 줄지 않은 것을 두고 법 탓을 하고 있다. 안전관리의 주체라면 규제 완화를 내세우기 전에 사고를 막지 못한 데 대한 반성이 우선 아닐까.

노동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노동자는 단순한 보호대상이 아니라 위험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제거하는 주체로 임해야 한다. 영국 등 안전 선진국은 노동단체와 현장 노동자의 협력과 참여가 밑바탕이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망자가 줄지 않고 있으니 더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우는 것은 안전관리가 남의 일이라는 태도로 보일 수 있다. 재해를 줄이기 위해 노동계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앞세워야 하지 않을까.

노사가 주체로서 안전관리를 잘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줘야 하는 정치권은 어떠한가. 얼마 전 모 국회의원이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초안을 내놓았다. ‘중대재해예방 전문기관을 신설해 경영책임자 등이 안전업무를 위탁할 경우 안전보건 확보를 다 한 것으로 한다’는 취지다. 참으로 무책임하다.

숙제는 과외선생이 하고, 논문은 전문기관에 대필토록 하겠다는 발상이다. ‘위험을 생산하는 자가 위험을 통제하는 가장 적합한 위치에 있다’는 안전관리의 기본원칙에 정면으로 반한다. 경영책임자에게 안전보건확보 의무를 직접 부과해 안전보건을 경영의 본질로 삼도록 하겠다는 법 취지는 온데간데없다.

초등학생 때는 선생님이 연필 잡는 법부터 숫자 세는 법까지 가르친다. 대학생은 그럴 수 없다. 스스로 자료를 찾고 학습하고 연구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제·사회적 수준은 안전관리에 있어 대학생이기를 요구한다. 위험을 찾아내고 이를 통제할 적절한 방법을 찾는 것은 사업주의 책임이고 그 결과는 ‘내 탓’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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