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에 멈춰선 파리행 기차…그래도 노동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한겨레 2023. 2. 1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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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연금개혁 현장서 느끼는 노동과 노후
지난달 31일 프랑스에서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전국적 파업과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파리의 한 국립 고교에서 시위에 참여한 고등학생들이 고교 문을 막고 항의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왜냐면] 이은우 | 프리랜서 저자·기자

지난달 19일(현지시각)에는 프랑스 파리 전역 대중교통이 마비되고 파리 관광의 상징인 에펠탑마저 관광객들의 발걸음에 빗장을 걸었다. 31일에는 100개 이상의 학교들이 임시휴교에 들어갔다. 이달 7일과 11일에도 시위자들의 함성과 펼침막으로 도심이 달아올랐다. 이러한 간헐적 총파업과 대규모 시위를 제외하고도 매일 소규모 파업이 지속하며 각종 서비스가 정체되고 있다. 어째서 프랑스에서 전국적으로 100만 명이 넘는 시위자들이 시가지로 쏟아져 나왔을까.

처음엔 의아했다. 국민연금 100%를 받는 법적 연령을 만 62살에서 64살로 늘리겠다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개혁안이 어느 정도 타당성 있다고 필자는 생각했다. 현 국민연금 체계 아래 프랑스인은 41년 동안 근무한 뒤 최소 62살부터 정년퇴직해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다. 현재 의회에서 심의하고 있는 개정안은 평생 근무 기간 조건을 41년에서 43년으로 연장함으로써 자연스레 정년퇴직 연령을 2년 늦추겠다는 것이다. 간략히 말해, 근로자들을 일터에 조금 더 데리고 있으며 정부에 사회보장부담금을 더 오래 내게 하는 것이다.

프랑스 국내총생산의 14%가 연금으로 지출되는 현 상황에서 은퇴층은 많아지고 이를 부양하는 젊은 노동력은 위축되고 있다. 국민연금 발 부채만 매년 팽창하고 있다. 55~64살 연령층 가운데 57%만 일하고 있다. 옆 나라 독일의 74%와 우리나라 정년퇴직과 견주면 고개가 갸우뚱해질 것이다. 또 고등학교 졸업 직후 취업했거나 본인 저축 상황에 따라 국민연금의 도움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경우엔 62살 전에도 은퇴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인들의 평균 은퇴 나이가 60, 61살인 이유다.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세 번째로 낮은 수치다.

이번 프랑스 연금개혁 반발에 의구심을 품었던 또 다른 이유는 프랑스인들의 생활이었다. 대개 여름 3주 정도는 지중해로, 겨울 2주 정도는 알프스로 휴가를 떠난다. 이런 느긋한 근무 상황에서 2년 정도 더 일하고 최저 상향 조정되는 국민연금 160만원을 매달 받으라는데 왜 이렇게 소란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필자의 심정은 지극히 화이트칼라 식 망탈리테(심성)에 불과했다. 노동환경과 고용 특전이 좋은 사람들이나 높은 급여와 두둑한 노후 자금 덕에 국민연금이 어떻게 개편돼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현재 일련의 파업과 시위에 동참했을까? 아니다. 노동조합들과 함께 파업 활동을 전개하고 데모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흔히 말해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나 근속이 불가하고 불규칙적으로 일터를 옮기는 바람에 근무 햇수 43년을 쉽사리 채우지 못하는 저소득층이다.

프랑스의 ‘건강한 기대수명’, 즉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삶을 즐길 수 있는 연령의 한계는 평균 64살이다. 평균치이기에 노동자들이나 빈곤층은 이 한계에 더 일찍 도달한다는 뜻이다. 프랑스 국립 통계 경제 연구소에 따르면 하위 5% 저소득층 남성들의 25%가 62살 전에 사망한다. 게다가 생존해 있는 노동자들에게 60대에 2년 더 몸을 굴리라고 말하는 것은 남은 노후의 질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다. 어떤 이들은 43년 근속 조건을 채우려면 60대 후반까지 일해야 한다.

시위 군중 속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니 부모님들이 50대부터 고역으로 인한 잦은 병치레를 치러왔다고 했다. 2018년 130만 유로(약 17억원) 이상 부동산을 보유한 최상위층에 부과하던 부유세를 폐지한 마크롱 정부가 이제는 노동자의 몸을 갈아서 재정 공백을 메꾸려 한다고 입을 모았다.

현존하는 프랑스 복지 체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를 이끌었던 인사들의 유산이다. 전후 프랑스 정부가 복지국가를 구축하라는 이들 요구에 부응해 1990년대 초까지 국민연금을 확장하고 향상해왔다. 국민 의료보험에서부터 국민연금과 고등교육까지 웬만한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사회안전망을 갖추게 됐다. 수십 년 동안 젊은이들이 노인과 약자들의 복지 비용을 충당해오며 세대 간 유대감을 배양하는 데 큰 몫을 한 것도 이러한 복지제도다.

하지만 많은 세계 여론은 프랑스 국민연금이 자신들의 실정보다 터무니없이 좋아 보이기에 마크롱식 연금개혁이 옳다고 하고 있다. 건전한 몸과 마음을 유지한 채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을 그저 배가 아프니 비판하는 것이 맞을까? 프랑스 복지제도에서 교훈을 얻어 노동자들이 노후에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더 나은 구상을 염원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철도파업으로 파리행 기차가 끊겨 승강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필자는 파업 노동자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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