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 칼럼] `라면사태` 놓고 갈팡질팡하는 식약처

2023. 2. 1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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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작년에 사상 처음으로 7억6000만 달러를 기록한 라면의 수출에 빨간불이 켜졌다. 대만·태국에서 라면 스프에 들어있는 2-클로로에탄올(2-CE)을 문제 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약처의 대응이 묘하다. 상반기 중에 아시아·태평양 지역 협의체(APFRAS)를 만들어서 관리 기준을 국제적으로 통일하도록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겠다는 것이다.

유해물질의 허용기준만 나라마다 다른 것이 아니다. 고속도로의 제한속도가 나라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안전에 대한 사회적 기대치가 달라서가 아니다. 아우토반에 제한속도를 설정하지 않는다고 독일 정부가 국민의 안전을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자동차의 성능, 도로의 안전설비, 과속을 단속하는 제도·장비가 모두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제한속도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나라마다 다르다.

허용기준도 제한속도와 마찬가지다. 허용기준은 인체위해성만을 근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허용기준을 강화하면, 제품이 가격을 포함한 사회·경제적 비용도 늘어난다. 아무리 위험한 성분이라도 사회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으면 어쩔 수 없다. 심지어 국민적 취향도 고려해야 한다. 소비자가 위해성을 기꺼이 감수하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다. 술·담배·벤조피렌 등의 경우가 그렇다.

유해물질 허용기준을 국제적으로 통일하겠다는 식약처의 기대는 허용기준의 현실적 의미를 무시한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가공식품에 대한 국제적 규격이 없는 것도 아니다. 1962년 세계보건기구(WHO)와 세계식량기구(FAO)가 공동으로 창설한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가 권고하는 규격도 있다. 우리나라 김치의 규격도 CODEX에 등록해놓았다. 그렇다고 모든 나라가 CODEX의 규격을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한정된 APFRAS가 라면의 허용기준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착각일 뿐이다.

식약처의 리더십에 대한 착각도 심각하다. 우리 소비자들도 식약처의 전문성·윤리성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에 온갖 식품괴담이 넘쳐나는 것도 식약처의 무능력 때문이다. 식약처는 천일염·죽염·간장·된장의 품질에 대한 소비자의 불안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2017년 여름에 불거졌던 '살충제 달걀' 소동으로 드러난 식약처의 능력은 참혹했다.

2021년 12월에 시작된 변색 샴푸에 대한 일방적이고 불합리한 규제도 식약처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광고금지 조치는 행정법원에서 기각되었고, 성분 사용금지 예고는 규제개혁위원회에서 거부되었다. KAIST 총장까지 나서서 "제도가 신기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식약처를 격하게 비판했다. 그런데도 정권 교체기의 식약처는 막무가내였다.

식약처의 횡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의약품·가공식품·화장품·인체적용제품의 위해성은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모든 국가에서 통용되는 관행이다. 인체 위해성은 충분한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국회가 정해놓은 법률에도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식약처가 인체 위해성 판단의 틀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런데 위해성 판단에 '전문성'보다 '공정'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궤변이다. 제도적 근거도 찾을 수 없는 황당한 변칙이다. 식약처의 전문성과 윤리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작년 12월 식약처의 용역사업을 떠맡은 소비자단체협의회가 구성한 '화장품원료안전성검증위원회'는 반드시 해체해야 한다.

다른 나라 식약처를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라면에서 검출된 유해성분의 정체와 유입경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합리적인 관리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식약처의 본분이다. 식약처가 추구하는 '공정'은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는 노력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소비자단체를 앞세운 허울뿐인 '공정'은 소비자를 속이기 위한 비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구호일 뿐이다. 국가적 현실을 외면한 국제적 '허용기준'에 대한 환상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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