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빠진 농구공, 예술로 되살려

이한나 기자(azure@mk.co.kr) 2023. 2. 1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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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신화'스포츠로 개념미술
85년생 美 작가 타이럴 윈스턴
26일까지 가나아트보광 전시
버려진 농구공을 미학적으로 재배열하는 대표 작품 'Build Me Up Buttercup'(2022) 앞에 선 타이럴 윈스턴.

바람 빠진 농구공과 해어진 농구 골망, 립스틱 자국이 선명한 담배꽁초 등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자 헐렁한 운동복 차림의 스포츠 마니아들이 이태원의 낯선 갤러리에 모여들었다.

서울 용산구 가나아트 보광에서 미국 LA 출신 개념미술 작가 타이럴 윈스턴(38)의 국내 첫 개인전 'Stealing Signs(서명 훔치기)' 모습이다. 오랫동안 방치됐던 은행 건물을 날것 그대로 개조한 갤러리 공간과 어울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첫 번째 레디메이드 조각 '자전거 바퀴'(1913)를 오마주한 'Trace Elements'(2022)부터 눈에 들어온다. 자전거 바퀴가 아니라 농구 골대가 스툴 위에 세워졌다. 2021년 요절한 천재 패션디자이너 버질 아블로(1980~2021)가 소장한 작품의 연작이다. 애초 아블로와 2인전을 꿈꿔왔던 작가는 그를 추모하는 마음에 이 작품을 선보였다. 아블로의 '3%의 미학'처럼 작가는 기성품을 살짝 비틀어 영리하게 작품화하고 있다.

작가는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단기 일자리도 못 구해 막막한 시절을 견뎌내야 했다. 당시 자기 모습이 마치 '인간쓰레기'라며 비관할 때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우연히 접한 '다다이즘(Dadaism)' 전시가 계시처럼 다가왔다. 이때부터 브루클린과 맨해튼의 버려진 물건에 담긴 인간 개개인의 역사를 창의적으로 결합하는 '아상블라주' 기법으로 희망과 절망, 부활과 재생, 생명력과 무모함이란 주제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월가 직장인이 술 마시면서 피웠을 담배꽁초를 모으고, 길거리 공원에서 10대 흑인 소년이 굴리던 농구공에서 개개인의 서사를 읽었다. 지난해 미국 크랜브룩미술관에서 첫 미술관 개인전을 열며 주목받고 있다. 그의 서울 오프닝파티 때는 그가 리복과 협업 제작한 하얀 운동화를 신고 와서 사인을 부탁하는 젊은이들도 목격됐다.

윈스턴은 "멋진 도시 서울에서 전시를 열어 방문하니 기쁘다"며 "스포츠와 예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분야에 걸쳐 작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고 했다. 최근 회화로 확장 중인 작가는 전시 제목과 통하는 'Punishment Paintings' 연작도 선보였다. 'Bigger than the Pope(Michael Jordan)(교황보다 큰 마이클 조던)'(2022) 등 유명 선수의 자필 서명을 반복적으로 쓰고 지우는 방식으로 표현해 유명인에 대한 집착을 꼬집었다. 버려진 성조기를 하얗게 칠해 걸어둔 'White Trash(백인 쓰레기)'에서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도 읽힌다. 낡은 농구 골망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골망으로 교체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도 현지 지역사회에서 화제가 됐다. 전시는 26일까지.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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