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55년간 눈감은 정부…이젠 진실 밝혀야

한겨레 2023. 2. 1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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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베트남 꽝남성 퐁니마을 집에 머물던 응우옌티탄이 7일 승소 판결 뒤 변호인단과 화상 연결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 제공

임재성|변호사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국가배상소송 피해자 대리인)

“한국 정부와 참전 군인이 사실을 인정하고, 당시 사건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세요. 저는 8살부터 지금까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다쳤던 곳은 아직도 아픕니다. 잊을 수 없습니다. 사실대로 판결을 내려주시길 원합니다. 저는 베트남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재판장님, 저를 도와주세요.”

2022년 8월9일 응우옌티탄(63)이 대한민국 법정에 출석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다. 1960년생 응우옌티탄은 1968년 2월12일 베트남 중부 꽝남성 퐁니마을에서 마을을 수색하던 한국군에 의해 복부에 총상을 입었다. 창자가 밖으로 쏟아질 만큼 심각한 부상이었지만, 한국군이 떠난 직후 피해자를 구조하기 위해 마을로 진입한 미군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죽다가 살아났다. 이날 엄마와 이모, 언니, 동생, 조카는 한국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2001년 베트남을 찾은 고경태 당시 <한겨레21> 기자와 처음 만난 41살의 응우옌티탄. 응우옌티탄은 “집 땅굴 위에서 수류탄을 들고 나를 노려보던 그날 그 남자 때문에, 한국 남자만 봐도 심장이 뛰었다”고 증언했다. 고경태 선임기자

55년 만에 인정된 대한민국의 책임

8살 아이는 10개월 가까이 병원에 입원한 뒤에야 퇴원할 수 있었다. 이후는 전쟁고아로서의 삶. 그녀는 지금도 공부하지 못한 유년기를 한스러워한다. 외로움도 커서, 밤이면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2000년대 초부터 마을로 찾아와 고개 숙이는 소수의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두뼘 길이가 넘는 복부 상처를 보여주며, 1968년의 고통을 들려줬다. 2015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 중 최초로 한국을 찾았다. 그녀의 증언이 예정된 행사장 밖에서 참전군인들은 “베트콩”을 외치며 시위를 했다. 학살의 기억이 떠올라 벌벌 떨었지만 피하지 않았고 증언했다.

2020년 대한민국을 상대로 학살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7일 판결이 선고됐다. 응우옌티탄의 완벽한 승리. 한국군이 비무장 민간인에게 행한 불법행위는 증거에 의해 모두 인정되고, 피고 대한민국의 소멸시효 항변도 권리남용으로 배척돼야 한다는 판결. 대한민국 공식기관에 의한 최초의 민간인학살 인정. 대한민국 법정에서 고통과 진실을 호소했던 그녀는 이 승소 소식을 듣고 말했다. “학살당한 영혼들도 이제 안식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무도 기쁩니다.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이제 가해국 대한민국은 선택해야 한다. ‘1심인데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자, 피해자 1명의 소송에 불과하니 크게 신경 쓸 것 없다’와 ‘사법부가 전쟁범죄를 인정할 때까지, 공론화 이후 20여년 동안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니 부끄럽다. 더는 외면해서는 안 되고 외면할 수도 없다. 정치와 정책이 필요하다’ 사이의 선택. 무책임한 외면과 신중한 응답 사이의 선택.

세번째 국면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는 지금 세번째 국면이 열렸다. 첫번째 국면은 1999년 주간지 <한겨레21>의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촉발됐다. 위 기사에는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있었고, 민주화라는 토양을 쌓아온 한국 사회는 이 증언에 반응했다.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시작됐고,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였으며, 진실규명을 위한 민간 차원의 활동이 이어졌다.

<한겨레> 2000년 1월1일치 13면 하단광고.

공론화가 제도적 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당시 기사나 성명서들의 끝은 비슷했다. ‘이제 정부가 나서야 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나서지 않았다. 이슈를 끌어갈 시민사회 역량도 부족했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은 ‘익숙한 참상’이 됐고, 대한민국은 다시 폭력을 잊었다. 사회학자 윤충로는 한국 사회의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와 관련해 1999년 전까지를 ‘폭력을 망각한 시기’로, 2000년대 중반 이후를 ‘망각이라는 폭력을 행사한 시기’로 구분한다.

두번째 국면은 2015년 피해자들의 최초 방한으로 시작됐다. 공론화 15년 만에 피해자들이 비로소 한국에 왔을 만큼 이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역량은 부족했다. 하지만 학살 피해자들이 전국을 다니며 증언하자 변화가 생겨났다. 첫번째 국면처럼 사회적 반향이 컸던 것은 아니지만, 법률가나 학자 등 전문가들이 이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한-베 평화재단’이라고 하는,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단체도 한국에 설립됐다.

두번째 국면의 핵심은 베트남 피해자들이 주체가 돼 한국 내 제도적인 절차의 문을 두드렸고, 그 과정을 한국 시민사회가 지원했다는 점이다. 2019년 피해자 103명은 ① 진상조사와 사실인정 ② 공식 사과 ③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요구하며 청와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2020년에는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고, 2022년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한국 정부에서도 검토가 이뤄졌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2018년 10월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진상조사 기구 설치를 위한 제안’이라는 문서를 생산해 청와대에 제출했다. “한국 정부가 20년 가까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고,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자체가 없다는 점은 향후 정부가 관련 입장이나 정책을 검토함에 있어서 큰 문제”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국방부 산하 진상조사 기구를 설치·운용하자는 제안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국방부, 외교부 등 관련부처 의견 확인을 거친 청와대는 논의를 더 진전시키지는 않았다. 외교부의 반대가 강력했다고 전해졌지만, 청와대 역시 큰 의지는 없었다. 그리고 2019년 9월 피해자 청원에 대한 국방부 답변으로 문재인 정부 최종입장이 발표됐다. “관련 자료를 확인해보았으나 청원인들이 주장하는 민간인학살은 확인되지 않았고, 진상조사 역시 실시할 수 없다.”

과거사 문제에 적극적이었던 문재인 정부였지만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에 관해서는 공론화 20년 만에 ‘학살은 없고, 조사도 없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은 셈이다.

세번째 국면은 응우옌티탄의 승소 판결과 함께 열렸다. 국방부는 학살을 확인할 수 없다고 했지만, 법원은 학살이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에 대한 한국 정부의 견해는 무엇인가? 외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국면이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뭘 해야 하나

무엇을 할 것인가. 최우선은 공식적인 진상조사 절차일 수밖에 없다. 이 절차가 선행돼야만 정부 견해를 내놓을 수 있고, 사과든 피해회복 조치든 가능하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나 검토도 없었다. 이건 보수적인 용법으로 사용되는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는 무책임이다.

공식적인 진상조사와 관련해서는 단계별 접근이 필요하다. 피해국인 베트남 정부와의 공동조사가 원칙이겠지만 베트남 정부가 이 문제에 소극적인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공동조사를 2차 조사로 미루고, 한국 정부 단독으로 1차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자국 군대의 전쟁범죄 혐의를 조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조사할 의무도 있다. 조사 대상은 한국 정부의 문서자료와 미국 쪽 자료, 참전군인 진술 등이다. 베트남 피해자 진술의 경우, 희망자의 진술 청취 방식이라면 베트남과의 주권충돌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의 단독조사에는 세가지 방식을 검토할 수 있다. 첫번째는 현존하는 과거사조사기구인 진화위를 통해 포괄적인 직권조사를 할 수 있다. 1968년 2월24일 130여명이 학살당한 하미마을 사건의 피해자 5명이 이미 2020년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지만, 진화위는 정치적 부담감을 이유로 조사 자체를 무기한 보류한 상황이다. 진화위가 하미마을 사건 조사개시결정하고, 더불어 직권으로 다른 학살사건들 포괄적 조사에 나서면 된다.

두번째는 2018년 정책기획위원회가 제안한 대로 국방부 산하 조사위원회 설치다. 2017년 발족한 ‘5·18특별조사위원회’와 같은 방식인데, 국방부 훈령으로 민간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위원회를 만들고 3년 정도 활동기간을 보장하면 된다.

마지막 방식은 입법을 통한 독립적인 진상조사 기구 설치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발의된 바 있지만 임기종료로 폐기됐다. 현 21대 국회에서는 민주당 강민정 의원이 대표발의자로 20대보다 훨씬 더 많은 의원이 참여하는 법안이 준비 중이다.

김기태의 증언이 실린 2000년 4월27일치 <한겨레21> 305호 표지.

베트남이 원하지 않는다? 잘못된 합리화

베트남 정부가 이 문제에 소극적이라는 점은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진상규명을 외면하는 주된 명분이었으나, 두가지 측면에서 잘못됐다.

우선 한국 정부가 사과하고 피해회복 조처를 해야 할 대상은 베트남 정부가 아니라 베트남 피해자들이다. 베트남 피해자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해 승소한 상황에서 언제까지 베트남 정부 핑계를 댈 것인가. 베트남 피해자들은 사과와 피해회복 조치를 원한다.

다음으로 베트남 정부의 태도도 변하고 있다. 이번 판결에 베트남 외교부 부대변인은 지난 7일 “퐁니·퐁넛 학살은 20세기 말 외국 군대가 베트남 국민을 상대로 저지른 많은 학살 중 하나”, “한국의 판결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베트남은 베트남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무척 중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베트남 정부의 공식 견해는 ‘학살은 역사적 사실이고, 이 문제에 대해 정부가 직접 나서진 않지만 피해자들의 권리행사는 보장한다’이다.

한국 정부는 신속히 1차 조사를 위한 준비에 나서야 한다. 1999년 12월 <한겨레21>에 실린 베트남 퇴역 장성 레치투언의 이야기다. “국민대표, 기자대표, 정부대표, 국방부대표를 모아서 조사단을 꾸려라. 그리고 여기 와서 주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라. 빈딘성 19번 도로를 따라서 맹호가 우리 주민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한국군이 어떤 고통을 가했는지. 제발 와서 사실을 알라는 것이다.” 이 마땅한 요구에 우리가 비로소 응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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