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가 사랑한 ‘소박한 아름다움’… 봄을 알리는 色色의 야생화

2023. 2. 13.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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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명 프리뮬러 ‘봄에 처음 핀다’ 의미… 북반구 온대지방에 450종 분포하는 ‘앵두 닮은’ 꽃
동양선 어린싹 나물로, 서양선 꽃잎 샐러드로 먹어… 뿌리의 사포닌은 기침·가래에 좋아
23 앵초
▼연못가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일본앵초(P. japonica) 품종. ⓒ박원순
중국앵초(P. sinensis). 존 린들리(John Lindely)의 ‘식물학 선집’(Collectanea Botanica, 1821∼1826)에 수록된 수작업 채색 판화.
카우슬립(cowslip)이라 불리는 프리뮬러 베리스(Primula veris). 오토 빌헬름 토메의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식물상’(1885)에 수록된 그림.

앵초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렐 만큼 예쁜 꽃이다. 앵두꽃을 닮아 앵초라 부르는 이 꽃은 이른봄에 보라, 노랑, 빨강, 분홍, 파랑, 하양 등 여러 빛깔로 피어나 꽃시장과 정원에 화사한 봄기운을 불어넣는다. 긴 겨울 동안 추위에 얼어붙은 마음을 스르르 녹여 주는 아름다움을 지닌 앵초는 오래전부터 소중한 약초로서 사람의 몸을 치유해 주기도 했다.

앵초의 속명인 프리뮬러(Primula)는 ‘첫 번째’를 뜻하는 라틴어 프리무스(primus)에서 유래했다. 봄에 처음 꽃이 핀다는 뜻이다. 앵초속은 주로 북반구 온대 지방에 약 450종이 분포하는데 유럽에 30여 종, 북아메리카에 20여 종, 나머지는 아시아 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특히 중국-히말라야 지역에 절반가량이 분포하고 있다. 습지에서부터 고산 지역, 그늘진 숲 속과 바위 틈새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서식지에서 자란다. 우리나라에도 깊은 산중에서 산겨릅나무 잎을 닮은 손바닥 같은 잎과 함께 진홍색 꽃을 피우는 큰앵초(P. jesoana), 어린 상추 잎 같은 주걱 모양의 잎과 함께 바위틈에 자라는 설앵초(P. modesta) 등 6종의 자생 앵초들이 국가표준식물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박원순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앵초라고 부르는 종과 서양인들에게 친숙한 앵초 종류가 다르다. 먼저 우리가 앵초라 부르는 식물은 한국, 중국, 일본이 원산지로 겨자 잎처럼 생긴 잎들 사이에서 한 뼘 정도 높이로 곧추 자란 꽃줄기 끝에 여러 송이의 분홍색 꽃들이 사방을 바라보며 앙증맞게 모여 달리는 종류다. 프리뮬러 시에볼디(P. sieboldii)라는 학명을 갖고 있는데, 독일인 의사이자 생물학자로 1820년대 일본의 식물을 연구한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의 이름이 종명으로 붙었다. 각각의 꽃은 다섯 장의 하트 모양 꽃잎으로 갈라지는데 밑부분은 통 모양으로 합쳐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꽃의 모양이 앵두꽃을 닮았다고 해서 한자어로 앵초(櫻草)라 부르는데 일본에서는 벚꽃과 비슷하다 하여 ‘사쿠라소’라 부른다. 앵초의 어린싹은 나물로 먹고 꽃은 관상용으로 사용하며, 뿌리는 진해, 거담의 효과가 있다.

서양의 대표적인 앵초 종류는 일반적으로 ‘프림로즈’(primrose)라 불리는 프리뮬러 불가리스(P. vulgaris)다. 주름진 잎들 사이로 여러 줄기의 꽃대가 올라와 연노란색 꽃을 한 송이씩 피우는데 안쪽 중심부는 오렌지색이다. 프림로즈 꽃은 먹을 수 있다. 비타민C, 베타카로틴, 칼슘이 풍부하여, 스페인에서는 샐러드에 넣어 즐기기도 한다. 프림로즈 역시 기관지 분비물 배출을 촉진하는 기침약으로 쓰여 왔다. 뿌리에는 사포닌을 비롯해 항산화, 항균, 항염증에 좋은 플라보노이드도 풍부하다.

치유력과 관상 가치가 높은 또 다른 앵초 중에는 프리뮬러 베리스(P. veris)가 있다. 베리스(veris)는 봄에 꽃이 핀다는 뜻이다. 높다란 꽃줄기 끝에 노란색 종 모양의 꽃들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달린다. 원산지는 유럽과 서아시아의 온대 지방인데, 영명인 카우슬립(cowslip)은 이 식물이 소똥이 많은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그만큼 목초지에 흔했던 꽃이었지만 지금은 서식지 감소로 매우 희귀한 식물이 되었다. 꽃들이 모여 달린 모양이 꼭 열쇠 꾸러미 같아서 ‘천국의 열쇠’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요한 수난곡’ 속에도 ‘천국의 카우슬립’이라는 묘사가 등장한다.

릴케, 워즈워스 등 위대한 시인들의 시 속에서도 이 꽃을 종종 만날 수 있다. 특히 릴케는 이 꽃의 소박한 아름다움에서 진정한 행복감을 발견한 듯하다. “프리뮬러여, 나는 나의 단순한 드레스를 좋아하기 때문에 더 높은 것을 목표로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은 만족에 있다고 믿어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도 카우슬립의 노란 꽃잎에 점점이 박혀 있는 오렌지색 반점을 진주라고 표현하는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찰스 다윈은 1877년 이 꽃에서 과학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했다. 꽃마다 꽃술의 길이가 다른 이형화주(heterostyly)에 관한 것인데, 앵초의 꽃 중심부에 있는 구멍으로부터 수술보다 암술이 길게 나와 있는 장주화(長柱花, pin flower)와 반대로 암술이 짧고 수술이 길게 나와 있는 단주화(短柱花, thrum flower)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식물이 자가수정을 줄여 근친교배의 확률을 감소시키기 위해 암술머리와 꽃밥의 위치가 서로 다른 꽃을 만들어 낸 진화의 산물이다.

앵초류는 점점 더 많은 교배종과 재배품종들로 분화되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중 폴리안투스(Polyanthus) 타입, 혹은 프리뮬러 폴리안사(Primula x polyantha)라는 앵초 종류는 18세기 플로리스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꽃이 많다’는 뜻을 지닌 폴리안투스 계통의 품종들은 프리뮬러 불가리스(P. vulgaris), 프리뮬러 베리스(P. veris), 프리뮬러 엘라티오르(P. elatior) 사이에서 탄생했다. 19세기 말 영국의 저명한 가든 디자이너 거트루드 지킬이 폴리안투스 품종을 정원에 쓰기 시작하면서 이 계통은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아우리쿨라(Auricula) 타입도 유명하다. 프리뮬러 아우리쿨라(P. auricula)와 프리뮬러 히르수타(P. hirsuta)의 교배를 통해 만들어졌는데, 원래 알프스 산맥 같은 고산 초원 지대가 원산지여서 고산 정원 또는 암석원, 화분 재배용으로 적합하다. 이 타입은 독특하게 꽃 중심부에 동그란 ‘눈’(eye)이 있는데, 꽃잎 가장자리와 중심부 색깔이 확연한 대비를 이루어 관상 가치가 높다.

19세기 초에는 중국으로부터 여러 앵초 종류들이 유럽에 도입되어 유전자 풀이 더욱더 다양해졌다. 중국앵초(P. sinensis)는 1821년 영국에 도입되었으나 원산지는 확실치 않았다. 중국에서 워낙 오래전부터 재배되어 왔지만 야생종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앵초는 아주 큰 인기를 끌면서 매우 다양한 품종으로 개발되었다. 특히 노란색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색깔의 꽃이 나왔으며, 꽃잎 가장자리에 술장식이 되어 있는 종류도 있었다. 중국앵초는 또한 식물 유전학계의 초파리 같은 역할을 수행하여 20세기 초까지도 모든 식물 가운데 유전적으로 가장 이해가 잘 되어 있는 식물로 유명했다.

19세기 말에는 중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많은 앵초 종들이 도입되었다. 일본앵초(P. japonica)는 1870년 영국의 식물수집가 로버트 포천이 일본으로부터 수집하여 이듬해 첼시 플라워쇼에서 꽃을 선보였다. 아시아 출신의 앵초 종류는 20세기 초 동안 매우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는 오늘날에도 화분 식물로 인기인 프리뮬러 말라코이데스(P. malacoides)와 프리뮬러 오브코니카(P. obconica)도 포함되었다. 전자는 원래 중국 윈난 지방 논에서 자라는 잡초처럼 자라던 이 식물을 1908년 스코틀랜드 출신 식물학자 조지 포레스트(George Forrest)가 발견하여 영국에 도입한 후 상업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후자는 중국 원산으로 하트 모양 잎과 함께 연보라색 꽃이 늦겨울부터 이른봄에 걸쳐 핀다. 둘 다 영국 왕립원예협회(RHS)로부터 우수정원식물(AGM) 상까지 받았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다.

1900년 폴란드 생물학자 줄리아 믈로코시에비치(Julia Mlokosiewicz)가 코카서스에서 발견한 프리뮬러 율리애(P. juliae)는 프리뮬러 불가리스와 교배를 통해 화단용으로 적합한 키 작은 앵초로 거듭났는데, 폴리안투스 앵초와 교배로 만들어진 ‘줄리안 앵초’ 같은 품종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00년대에 단지 30종 정도만 재배되었던 앵초류는 1920년대에는 거의 100종을 넘어섰다. 비즈 시즈(Bees Seeds) 종묘사를 운영했던 아서 불리(Arthur Bulley)는 캔들라브라(Candelabra) 품종들을 특화시켰는데, 일본앵초(P. japonica)에서 유래한 이 종류는 키가 크고 강건한 꽃줄기를 따라 꽃들이 간격을 두고 여러 층으로 돌려나서 마치 삼단 접시에 그득 담긴 과일 디저트처럼 아름다운 구조미와 색채미를 갖추었다. 1930년대엔 오리건의 플로렌스 벨리스(Florence Bellis)가 반헤븐(Barnhaven) 계통을 탄생시켰는데 눈에 띄게 높은 꽃줄기로 전문 가드너들에게 인기를 끌어 왔다.

매우 복잡한 품종들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앵초류는 습지, 연못가, 암석원, 숲, 화단, 또는 화분 등 다양한 정원 구역에 적용이 가능하다. 또한 종류별로 개화기가 달라 구색을 잘 갖추면 늦겨울에서 초여름까지도 꽃을 볼 수 있다. 원래 앵초류는 대부분 고지대, 고위도에서 자라기 때문에 ‘서늘함’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른봄 눈이 녹은 물로 축축한 초지대에서 충분한 햇빛을 받으며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운 뒤, 온도가 점차적으로 올라감에 따라 생장이 더뎌지다가 덥고 습한 여름이 찾아오면 휴면에 들어간다. 유기질이 풍부하며 지속적으로 충분한 수분을 공급받으면서도 물빠짐이 아주 좋은 토양을 좋아한다. 뿌리 부분을 시원하게 해주면 꽃이 더 오래 간다. 내한성이 약한 종류는 실내용 화분 식물로 키우는데, 일부 고산 종들은 겨울 동안 건조한 환경을 선호하기도 한다. 번식은 일반적으로 씨앗을 뿌리거나 포기나누기, 뿌리꽂이 등의 방법을 이용한다. 앵초는 비슷한 시기에 개화하는 복수초나 노루귀 같은 식물보다 재배가 쉽고 번식이 빨라 야생화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앵초의 꽃말은 ‘젊음’, 그리고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열정적인 사랑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제 곧 봄을 맞은 정원 연못가에 청초하게 피어날 앵초 꽃을 보며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얻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이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운지 진솔한 고백을 준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앵초(Primula sieboldii)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원산으로 축축한 초지대나 숲에서 자란다. 로제트를 형성하는 긴 타원형의 연두색 잎에는 주름이 많고 솜털이 나 있으며, 이른봄 곧추 자란 꽃대 끝에 2∼15개의 꽃들이 산형 꽃차례로 모여 달린다. 지름 2.5㎝ 정도의 꽃은 분홍색, 보라색, 진홍색을 띠는데, 중심부 꽃술 주변은 흰색으로 되어 있다. 내한성이 매우 강하고, 예로부터 기관지 천식에 뿌리를 달여 먹었으며, 식물 전체를 관절염이나 신경통 치료에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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