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숨어 읽기 좋은 곳, 책이 있는 케렌시아

강이라 소설가 2023. 2. 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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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라 소설가

12살 된 반려견이 거실 바닥에 쉬를 해놓고는 주인 눈치를 봅니다. 어쩌다 하는 실수인 줄 알면서도 짜증을 이기지 못해 버럭 소리를 지르니 꼬리에 불붙은 듯 달려 제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러고는 겁먹은 눈동자를 떼룩떼룩 굴리며 몸을 바짝 엎드립니다. 개집 앞으로 쫓아가 허리에 두 손을 척 올리고 쏘아보는데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에서 수의사가 한 말이 귓가를 스칩니다. 지금 강아지는 케렌시아로 들어갔습니다. 혼자 있게 해 주세요.

케렌시아(Querencia)는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 귀소본능의 장소를 의미하는 단어로 ‘바라다’는 뜻의 동사 querer(케레르)에서 나왔습니다. 투우 경기장에서 소가 위협을 피하고 지친 심신을 달래는 곳을 케렌시아라고 부릅니다. 코로나 블루(코로나 우울)로 인해 혼자만의 안식처를 찾는 현대인이 많아지면서 이제 케렌시아는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닙니다. 자신만의 책상, 단골 카페의 구석 자리, 즐겨 찾는 산책로의 같은 벤치 등 심리적 안정감과 정신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곳이 바로 케렌시아입니다.

요즘 저의 케렌시아는 지관서가(止觀書架)입니다. 지관서가는 울산시, 울산시 남구, 울산시설공단과 SK가 공간과 재원을 제공하고, 플라톤 아카데미가 기획한 도서공간 조성사업입니다. 서울대 인문확산센터와 인문360이 도서 큐레이션과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으며, 건축사무소 리옹이 공간을 디자인했습니다. 책 판매는 하지 않으니 북카페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울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열린 책 공간으로 2021년 4월에 문을 연 울산대공원 그린하우스 1호점을 시작으로 2호점 장생포 문화창고와 3호점 선암호수공원을 거쳐 지난해 유니스트(UNIST·울산과학기술원) 4호점까지 울산 지역 네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책 냄새, 커피 향 그윽한 창가 자리에서 문득 내다본 숲 바다 호수는 풍경 그 자체로 위안이 됩니다.

노트북과 읽을 책을 챙겨 들고 유니스트 교정에 위치한 지관서가를 찾았습니다. 집에서 제법 먼 이곳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지관서가 유니스트점이 내건 테마 때문이었습니다. 명상. 정신없이 달리던 마음이 쉼을 얻고, 잠시 멈춰 서 내면으로 눈을 돌리고 ‘인간다운 삶’에 대해 깊이 질문하는 곳, 이 공간에서 마음의 번잡한 것들을 꺼내어 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과 자연 속에 마련된 도피처에서 타인과 외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덜어내고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명상해 봅니다. 책 공간 명상의 조합이 더할 나위 없이 절묘하지 않습니까? 차 한 잔을 들고 통창 앞 좌탁에 앉아 오후의 느른한 빛을 받으며 눈을 감고 잠시 명상을 즐겨봅니다.

참! 함께 할 음악이 있습니다. 휴대폰 음악 어플을 열고 ‘Ode To Empty Room’ 앨범을 엽니다. 빈방에 바치는 소리 헌사, 음반 제목이 근사합니다. 이 음반을 만든 그룹의 이름도 ‘케렌시아’입니다. 그룹 ‘케렌시아’가 지관서가 유니스트점의 공간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음반이 ‘빈방에 바치는 소리 헌사’입니다. 50분 남짓한 트랙 내 5곡의 명상음악-고요 집중 텅 빔 자각 걷기-이 담겼습니다. 명상이 주제인 이 공간을 찾는 모든 이들이 비움의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제작한 음악이라고 합니다. 이어폰을 끼고 세 번째 트랙 ‘텅 빔’을 낮은 볼륨으로 엽니다. 척추를 세우고 바르게 앉아 눈을 감고 음악에 귀 기울입니다. 그리고 들숨과 날숨을 바라봅니다. 들고 나는 숨 사이, 텅 빈자리에 애써 무엇을 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관(止觀)합니다. 지(止)와 관(觀). 멈추어 본다는 뜻입니다. 불교의 명상법으로 사마타(止), 위파사나(觀)와 같은 말입니다. 사마타는 외부 대상에 흔들림 없이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상태를, 위파사나는 분별없이 관찰하는 상태를 가리키며 둘을 합쳐 지관 수행이라 부릅니다. 명상을 주제로 한 서가의 이름으로 이보다 더 맞춤할 수 있을까요.


숨어 읽기 좋은 곳이 울산에 있어 참 좋습니다. 이곳은 책과 자연과 음악으로 둘러싸인 완벽한 케렌시아입니다.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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