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멘터리] '콜센터 상담사' 소희의 일생

이주형 기자 2023. 2. 1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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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63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글을 쓰기 전에 첫 문장이나 끝 문장이 떠오른다면 행운이다. 글의 대략적 얼개(구성, 구조)까지 떠오른다면? 길조다. 워킹 타이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이걸로 해야겠다 싶은 제목을 만난다면? 대박이다. 아무리 긴 글이라도 맘에 드는 제목은 글 쓰는 내내 북극성이 되어 준다. 북극성이 있으면 어떻게든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다. 힘들어도, 길을 잃지는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영화 만들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데뷔작 "도희야(2014)"에 이어 두 번째 작품 "다음 소희"도 칸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정주리 감독은 "다음 소희"라는 제목이 시나리오 초기 단계에서 떠올랐다고 말했다. 오프닝과 엔딩 장면, 그리고 전반부와 후반부가 뚜렷이 나뉘는 영화의 구성까지도.

"다음 소희" 포스터 (제공:트윈플러스파트너스)

생방송 뉴스프로그램에 출연하러 와서 출연자 대기실에 앉아있는 정주리 감독에게 가장 최근에 본 영화가 뭐냐고 물었다. "고양이를 부탁해(2001)"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배두나에게 2002년 백상예술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안긴 작품으로 지난해 20주년 기념으로 4K 리마스터링 개봉까지 한, 어딘지 모르게 시대를 대표하는 듯한 작품이다. (제목도 수없이 패러디되었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배두나가 연기한 태희나 "다음 소희"의 소희는 고등학교를 나와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하려는 엇비슷한 나이다.

저쪽에서 분장실 거울을 바라보다 돌아선 배두나 배우와도 몇 마디 나누었다. 시사회 날 인터뷰에 이어 이날까지 두 번 스쳐 지나가는 동안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면 착각이겠지만, 영화에서의 배두나와 실제의 배두나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그가 고양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는 독립적이다. 고양이는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고양이는 부당한 대우를 참지도 않는다.

PART1. 콜센터, 감정노동 그리고 '벽'


"다음 소희"의 전반부는 특성화고 졸업반인 소희가 콜센터에서 일하다 끝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이야기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밝고 당찬 소희는 학교의 알선으로 콜센터 현장실습생이 됐다. 사무직 일자리를 얻었다며 좋아하던 소희는 이내 감당하기 어려운 콜센터 노동 현실에 시들어간다.

요즘엔 초등학생도 안 하는 '손들고 화장실 가기'가 남아있는 곳이 오늘날의 콜센터이고, 다닥다닥 붙어앉아 '코로나19 대규모 집단 감염'의 서울 지역 첫 번째 사례가 된 곳이 콜센터이고, 여성 흡연율이 평균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곳이 콜센터다. 폭언 노출과 감정 착취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이제 한국 사회는 콜센터 없이 돌아가지 않는다. 스무 곳 넘는 콜센터 업체에서 100명 넘는 콜센터 상담사를 인터뷰하고 연구한 역작 "사람입니다, 고객님"을 쓴 인류학자 김관욱 교수는 현재 콜센터는 200만 명이 일하는 약 4조 원대의 시장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사람입니다,고객님" 표지 (제공:창비)
콜센터가 진출하지 않은 곳은 없다. 제조업·건설업·도소매업·운수업·숙박 및 음식점업·출판 영상업·금융업 및 보험업·부동산업 및 임대업·교육서비스업·보건업·사회복지·예술 스포츠 및 여가 관련 서비스업·중앙 및 지자체 공공기관… 코로나 사태 속에서 가장 격무에 시달렸던 직종 중 하나가 콜센터 상담사다.
 
시민들은 정부 기관에 전화를 건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곳은 민간업체다. 그것도 약 2년마다 높은 실적과 낮은 인건비를 가지고 원청인 정부 기관에 재계약을 얻어내야만 하는 을의 위치다. (…) 그 콜이 아무리 중요하고 복잡해도 어떻게 해서든 소화해내야만 했다.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어떻게 '친절, 신속'하게 상담할 수 있을까? 한국콜센터 분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정확하지도 않고 매일 추가되는 (코로나19 관련) 배포 자료에 의지해 내가 맞는 상담을 하는지 확신이 없고, 그로 인해 민원인에게 폭언을 듣거나 원청으로부터 책임 전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해당 기관의 부서에 연결되지 않아 생기는 모든 불만을 상담사가 책임져야만 했다." ("사람입니다, 고객님" P195-196)

이 대목에서 우리는 코로나 사태 때 상담 통화가 왜 그토록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특히 콜센터의 '감정 노동'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상담사도 누군가의 가족이라며 친절하게 대해 달라는 안내 방송도 나오고 시민들 개개인의 자정 노력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까? 김관욱 교수는 묻는다.
 
고객만 친절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동정 혹은 공감의 부족만이 원인일까? 진상의 세계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진상과 상담사 둘이지만, 그 세계를 인정하고 유도하는 제작자는 없는 것일까? 왜 제작자는 논의에서 벗어나 있을까? ("사람입니다, 고객님" P104)

민원인이 상냥하게 말하면 콜센터 상담사가 나의 문제를 대부분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해주는가? 안타깝지만 아닐 경우가 많다. 왜일까? 그들은 '벽'이기 때문이다. 김관욱 교수는 말한다.
 
콜센터는 그 문제의 진짜 담당자, 관리자, 제작자, 사장을 만날 수 없게 차단하는 하나의 벽이다…. 콜센터 산업의 특징은 상담사와 고객과의 비대면을 넘어 바로 고객과 고용주와의 비대면이라는 점에 있다. ("사람입니다, 고객님" P354)

과연 일부 고객만 문제일까? 상담사에게 충분한 권한과 전문 지식을 주지 않고 불특정하고 다양한 모든 질문에 기계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서 상담사와 연결되기 전에도 이미 오랜 시간을 기다리다 약이 오를대로 오른 고객의 뚜껑을 열리게 만들고, 전화 뺑뺑이를 돌게 하는 기업들, 그들은 상담사라는 벽 뒤에 숨어버리고 애꿎은 상담사들만 '투구'라 불리는 헤드셋을 쓰고 욕받이 전사가 된다.

'감정 노동(Emotional Labor)'이란 표현은 1983년 미국의 사회학자 호크쉴드가 "관리된 마음:감정의 상업화(The Managed Heart:Commercialization of Human Feeling)"라는 책에서 처음 만들어낸 말로써 오로지 직장에서 일과 관련해서만 쓰는 개념이다. (요즘 흔히 쓰듯이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 쓰는 말은 아니다)

게다가 '감정 노동'은 고객의 성희롱이나 폭언에 참는 것도 아니다. 그건 그냥 (성) 폭력일 따름이다. 그런데 최근 '감정 노동'이란 개념이 오남용되면서 '진상'들의 폭력을 마치 감정 노동자들이 겪을 수도 있는 일, 혹은 그런 일을 감내하는 것이 감정 노동인 것처럼 오해될 때가 있다. 때때로 '감정 노동'은 사실 감정 착취, 인권 무시를 노동이라는 말로 치환함으로써 콜센터 상담사들이 마땅히 견뎌야 할 노동인 것처럼 들리게 만드는 단어이다.

그리고 나는 의문이 든다. 임금노동자는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팔지만, 감정까지 팔아야 하는 건 아니다. 콜센터 상담사들은 그저 이용자의 불만이나 요청을 듣고 해결 방안 등을 음성으로 안내하는 서비스를 파는 사람들이지 감정을 파는 사람들이 아니다. 게다가 감정을 어떻게 팔 수 있을까?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말은 있지만 실제로 영혼을 팔 수는 없다. 감정은 팔 수 있는 물건이나 상품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감정을 팔아서는 안된다.

다큐멘터리 "위로공단"· "미싱타는 여자들" 포스터
"다음 소희"는 "사람입니다, 고객님"이라는 책이 말하는 바를 영화적으로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리하여 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 소녀공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2022)"과 70년대 구로공단부터 오늘날의 노동 현장까지를 묘사해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은 다큐멘터리 "위로공단(2015)"의 계보를 극영화로 이어 간다.

PART2. "적당히 하십시다"... 인센티브와 '누칼협'

"다음 소희"의 후반부는 형사인 유진(배두나)이 소희 죽음의 배경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삶에 지칠대로 지친 형사 유진은 자살이 명백해 보이는 사건을 적당히 마무리하려다 관련자들을 만나면서 마음이 바뀐다. 나는 배두나를 따라다니며 우리 사회의 민낯을 발견해가는 후반부가 전반부보다 인상 깊었다.

유진은 소희가 마지막까지 일했던 콜센터로, 소희를 콜센터에 현장실습 보낸 학교로, 또 소희의 학교를 관리 감독하는 교육청으로 차례차례 찾아간다. 하지만 콜센터는 콜센터대로 상담사 개개인의 실적과 인센티브에, 학교는 학교대로 취업률과 인센티브에 목을 매고 교육청은 교육청대로 산하 학교 취업률과 인센티브가 얼마나 중요한지만 되뇌일뿐이다.

"다음 소희" 후반부의 대사들은 꽤나 직설적이고 노골적이지만, 흥미를 반감시킨다기보다는 단순한 힘이 있고 후련하다. 시사회 날 인터뷰에서 정주리 감독에게 물었다.

- 감독님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대사라면 뭘 꼽으시겠습니까?
- 기자님은요?
- 물론 저도 있습니다. 먼저 말씀해주시면 듣고 말씀드릴게요.
-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을 한다고 더 무시해" 이 대사입니다. 저는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담는 걸 극도로 꺼려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굉장히 그 장면에 공을 들였고, 배두나 배우가 그 말을 하는 순간을 계속해서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사람입니다, 고객님'을 쓴 김관욱 교수는 책을 쓰면서 더 질문을 던지고 싶었지만 대상이 보이지 않아서 답답했는데, "다음 소희"에서 형사 배두나가 끝까지 질문을 던지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많은 감정이 들었다고, 창 너머로 멀리 도봉산이 보이는 작은 연구실에서 말했다.

- 교수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요?
- '인센티브'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 그 단어가 왜 그렇게 기억에 남으셨어요?
- 콜센터는 사실은 감정 노동이 아니라 과도한 업무 실적이 요구되는 현장이고, 그 과도한 업무를 강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가 인센티브 제도거든요. 자기가 노력한 만큼 이득을 얻어 갈 수 있다라고 하는 희망. 그 희망을 가지고 옆의 동료와 경쟁하게 하죠…. 잘하는 사람은 경주말을 만들어서 전체 실적의 수치를 높이게 하고, 못하는 사람은 공개적으로 불러 세워 망신을 줘서 다른 상담사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경주마는 경주마대로 주변 상담사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왕따를 당하고…

이 영화에서 인센티브라는 단어는 콜센터 안에서만 사용되지 않고 학교 교사, 기업 간부, 교육청 장학사 등 모두가 씁니다. 콜센터식 인센티브에 얽매이는 시스템이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뿌리내려있다는 걸 영화가 잘 드러내주고 있죠.

인류학자로서 김 교수는 이런 (콜센터식)인센티브 시스템의 문제를 우리 사회의 '규범(Norms)'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규범은 어떤 사회가 정상적이라고, 옳다고 믿는 것들을 모아놓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공정한 경쟁에서 승자만이 윤리적이라고 판단하는 게 규범화되어 있는 사회같아요."

영화 "다음 소희"의 한 장면 (제공:트윈플러스파트너스)

소희 사건이 발생하자 부랴부랴 내려온 본사 법무팀 직원으로 보이는 양복 차림의 남자가 형사 유진에게 말한다. 회사 일이 힘들면 그냥 그만두면 되는 거 아니냐고.

현실의 배두나는 시사회 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제가 (영화에서) 장학사를 만났을 때 드는 무력감과 굉장히 비슷한 생각이 드네요.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죠, 사실. 근데 적어도 인간이 인간에 대한 어떤 이해심이나 연민을 갖는다면 특히나 만약에 그것이 오로지 나의 세상이었던 사람한테 그냥 바로 나오면 되지, 누가 칼 들고 협박했어? 왜 거기 있었어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잔혹한 것 같아요."

실제로 콜센터 노동을 견디기 힘들었던 소희는 콜센터 안 가면 안 되냐고 부모에게 넌지시 묻기도 했다. 그러나 가난한 부모도 돈이 필요했고, 취업률에 목매는 담임도 어떻게든 콜센터에 붙어있으라고만 했다.

내가 "다음 소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실은 주인공인 소희나 유진의 대사가 아니었다. 자신들도 관할 학교 취업률로 위에서 인센티브 받는다고 한 교육청 장학사가 유진에게 한 대사였다.

소희가 일했던 콜센터와, 소희가 다녔던 학교와, 소희의 친구들이 다니는 업체까지 다 돌고 나서 교육청으로 찾아온 -게다가 별것도 아닌 자살 사건 가지고 시간 낭비한다는 상사 경찰의 압박까지 받은- 유진에게, '학생이 일하다 죽었는데 누구 하나 내 탓하는 사람이 없다'는 유진에게, 장학사는 말한다.

"적당히 하십시다. 그래서요? 이제 교육부 가실랍니까? 그 다음은요?"

시스템이 그런데 일개 장학사 개인이 뭘 할 수 있냐는 장학사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요? 또 어디까지 미루실랍니까? 그 다음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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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jool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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