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피아니스트 백혜선의 '못생긴 발'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2023. 2. 1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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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콩쿠르여왕, 최연소 서울대 교수에서 좌절의 스페셜리스트까지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최근에 낸 책 이름을 보고,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그는 좌절과 관계없어 보이는 화려한 커리어의 소유자이니까요. 간단히 살펴볼까요.  

1965년생. 서울 예원학교 재학 중 미국 유학.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 러셀 셔먼과 변화경 부부에게 배웠습니다. 24살이던 1989년, 윌리엄 카펠 국제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1990년 리즈 콩쿠르, 199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잇따라 수상합니다. 1994년에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에 오르며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고, 곧 서울대 음대 최연소 교수로 임용됐습니다. 지금은 모교인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활동하며, 무대에 서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두 자녀가 모두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다는 소식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죠. 

그런데 사람의 인생은 이런 이력만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법이죠. 책을 읽으니, 그 화려한 성취 뒤편에는 수많은 고비와 좌절의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좌절의 스페셜리스트’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더라고요.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 백혜선을 초대해 직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음은 백혜선의 이야기 중 일부를 재구성하고 책 내용을 더해 쓴 글입니다. )    

 

콩쿠르 탈락 쇼크…전화회사에 취직

백혜선의 첫 번째 좌절. 바로 반 클라이번 콩쿠르 1차 탈락입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지난해 임윤찬이 우승했던, 미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콩쿠르입니다. 백혜선은 1993년 이 콩쿠르에 출전했습니다. 윌리엄 카펠 콩쿠르, 리즈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모두 입상한 직후였고,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습니다. 그런데 1차에서 떨어지다니! 모두가 상상도 못 했던 결과였습니다. 
평생 1차에서 떨어진 콩쿠르는 이게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지금껏 콩쿠르에서 입상했던 것은 운이 좋은 덕이었는데, 이제 운이 다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더는 피아노를 치지 말라는 신호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앞으로 나는 뭘 해야 하지, 막막해진 그는 정말로 피아노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쇼크가 컸던 거죠. 
 
28살, 29살이 애매한 때다. 공부는 끝났고 직장은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래서 그냥 회사에 취직해서 6개월 동안 일했다. 장거리 전화 회사였는데, 두 달 만에 매니저로 승진도 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꼭 피아노를 안 하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구나, 싶었다. 하지만 정말 아깝네. 이때까지 내가 한 건 피아노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재도전…1위 없는 3위

스승인 변화경 선생님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다시 한번 도전하라고 권유한 게 이때였습니다. 피아노는 포기했다고 하자, ‘지금 생각하지 말고 일단 지원서 내고 생각하라’고 강권했습니다.
 
처음엔 울면서 안 나가겠다고 했다. 1990년에도 나가서 안 됐는데, 이번에도 떨어질 게 뻔하다, 러시아는 절대로 동양 사람을 받아주지 않는다, 다시는 러시아 땅을 밟지 않겠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 사람은 도전을 하고 사는 거다. 힘들 때일수록 더 도전을 해 봐야 한다. 도전에는 아픔이 따르게 되어 있다.

결국 버티다가 지원 마감일에 원서를 넣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힘닿는 데까지 준비해 보고, 이번에도 떨어지면 그때 피아노를 접자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열 시간 이상의 연습을 반복하며, 몇 달간 쉬면서 몇 년 전으로 돌아간 피아노 실력을 다시 가다듬었습니다. 그렇게 나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를 차지한 겁니다. 

요즘이야 국제 콩쿠르에 한국인 수상자가 많지만, 당시는 한국인이 최종 결선에 오르는 것도 희귀한 시절이었습니다. ‘콩쿠르 여제’ 백혜선은 곧 서울대 최연소 교수로 임용됩니다. 그럼 좌절 끝, 행복 시작인가요? 하지만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이 자리가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울대 교수는 '안 맞는 옷'이었다

서울대 교수는 나한테 맞는 옷이 아니었다. 너무 일찍 그 자리에 간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배운 건 무대에서 연주를 하기 위해서였는데, 교수를 하니 학생들을 맡아서 가르쳐야 했다. 이렇게 살면서 내가 제대로 연습할 시간이나 있을까 싶었다.  
 
주변에선 서울대 교수가 ‘대한민국 사람의 꿈’이라고 했지만, 나는 남들과 같은 꿈을 꾸기 싫다고 말하곤 했다. 결혼하고 아기도 낳고, 그렇게 10년을 보내고 나서 드디어 사표를 냈다. 10년 동안 그만둘 준비를 한 셈이다. 

백혜선은 2005년, 마흔 살에 무직 상태로 어린 아들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납니다. 책에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교수, 연주자, 엄마로서 1인 3역이 너무 힘들었고 그 무엇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만약 하나를 버려서 나머지 둘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서울대를 그만두려고 했을 때 제일 반대했던 사람은 엄마였다. 학교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하는 순간, 당연한 수순으로 이혼이 따라오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했을지도 모른다…교수직을 그만두고 이혼하고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나간다 하는 나를 두고 주변에서는 미친 여자라고 여겼다…그때까지 나는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랐다. 그때부터 비로소 세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p.242~244) 
 

싱글맘, 생계 전선에 뛰어들다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연주 활동을 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쳤습니다. 말 그대로 ‘생계형 피아니스트’, 연주 수입으로 가족의 생계를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설 수 있는 어떤 무대든 마다치 않고 서기 시작했습니다. 아들 딸을 재우고 나서 밤새워 연습하고, 또 아침이 되어 아이들을 깨워 등교시킨 뒤에 잠깐 자고 또 연습하는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는 책에서 ‘아들은 혼자서 자랐고, 딸은 아들이 키웠다’고 썼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그동안 모았던 돈을 굴리면서 연주도 좀 하고, 아이들 돌보면서 여유 있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투자하는 것마다 잘 되는 게 없었다. 심각할 정도로 손실을 내서, 정말 먹고살기 위해서 연주를 해야 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제 매니저 이명아 대표님이 그랬다. 이제부터 네 인생은 진짜 시작이야. 피아니스트 되는 길은 이런 길이지, 헝그리 정신이 없으면 예술가라 할 수 없어. 쉽지 않겠지만 앞으로 몇 년 뒤에는 엄청나게 감사하게 될 거야. 

정말 40대는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너무너무 힘들었다. 아이들을 집에 두고 연주 여행을 다녔다. 아이들한테 ‘우리가 필요한 물건들을 사려면 엄마가 집을 비워야 한다’고 했다. 

새로운 곡을 할 때는 변화경 선생님이 계신 보스턴에 가서 레슨을 받았는데, 야단을 많이 맞았다. 아니 네가 나이가 이 정도 되면 성숙해서 아무 지적도 안 할 정도로 해야지, 이게 뭐냐. 하시는 거다. 그런데 아이들 키우면서 연주하고 새 곡 공부하는 게 정말 쉽지 않다. 억지로 배워서 새 곡 하겠다고 선생님 보여드리면 이렇게 야단맞고, 집에 돌아와서 너무 속상해서 울었다. 그럼 아이들이 ‘엄마 또 야단맞고 왔어?’ 하고 위로해 줬다. 항상 학생처럼 살았고, 아이들도 그런 저의 모습을 보면서 컸다. 

아이 둘 다 하버드에 입학했는데, 큰아이가 쓴 논문을 보니 “우리 엄마는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셨다. 엄마가 집에 없어야(연주 여행을 다녀와야) 우리가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를 남들의 열 번의 기회로 만들기로 했다’ 이런 얘기를 썼더라. 힘들게 지낸 시간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성장이 있는 삶에는 좌절이 함께 한다

하지만 그는 서울대 교수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난 자신의 선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최정점에 올랐다가 산산이 부서지고 다시 올라가는 과정을 다 겪고 난 지금이라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생계형 피아니스트로 자신의 결정에 호되게 책임을 지던 순간에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잘 풀리지 않는 오랜 날들을 살다 보면 그것을 비정상이라 여기고 겨우 매끄럽게 굴러가는 날들이 찾아왔을 때 마침내 나도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고, 반드시 이 생활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안온함이 반드시 정상일 필요는 없다. 정상과 비정상을 벗어나서 연주자가(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삶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더 나은 내가 되려는 삶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성장이 있는 삶에는 좌절과 불안과 걱정이 필연적으로 함께 한다. (p.246)

그는 아이들이 성장한 후에 다시 교수직을 맡으며 생활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클리블랜드 음악원에서 가르쳤고 지금은 모교인 뉴잉글랜드 음악원으로 옮겨 학과장을 맡고 있습니다. 임윤찬의 스승 손민수 교수도 다음 학기부터 이 학교에서 가르치게 될 예정이죠. 
 
아이들도 좋은 학교 보내고, 안정적인 직업도 찾았고, 그럼 백혜선 씨의 좌절은 끝난 걸까요. 그는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연주를 어떻게 다 잘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후배 연주자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자신의 설 자리는 어디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는 책에서 피아니스트의 삶은 원래가 끝없는 좌절의 반복이라고 썼습니다. 
 
곡을 내 것으로 익히는 과정이 무난하게만 흘러간다면 무엇하러 하루 열 시간의 연습을 하겠는가. 심지어 하루 열 시간 연습을 했는데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도 있다…기교가 주는 어려움은 그나마 시간을 투여하고 악바리처럼 버티고 기다리면 언젠가 정복할 수 있다. 나에겐 백오십 번의 훈련법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기교가 아닌 소리의 문제는 끝까지 극복되지 않을 때가 많다. (p.184)
 

헌신의 마음을 지닌 사람

그는 연주자가 노력과 성취의 등가교환이 주어지지 않는 직업이라고 썼습니다. 노력에 대해 가끔씩 보상이 내리기도 하지만, 아무런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는 잔혹한 현실을 알아둬야 한다고. 하루 열 시간의 연습을 반복했는데도 단 한 발짝도 못 나가거나, 실력을 갖췄음에도 인기와 유명세는커녕 존재감조차 없을 수도 있다는 현실을.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연주자는 자기 연마를 통해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나는 아무런 진전도 거두지 못했지만 이렇게나 열심히 연습했고 그러니 내일은 한발 더 나아가게 되리라, 하며 헛되어 보이는 시간에 기어코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시간이 행복이고 축복이라는 것을 진실되게 느껴야 한다. 사람이 자기 마음에 따라 어찌할 수 없는 것이 ‘결과’라면, 적어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과정’만이라도 충실히 그리고 기꺼이 따라야 한다. (p.191)

순진하다 할지도 모르지만, 세상은 헌신의 마음을 지닌 사람을 끝내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음악에 헌신하기로 마음을 다잡은 나는, 이제야 비로소 음악보다 덜 중요한 나를 받아들였고 취약한 자신을 전보다 사랑하게 되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여야 하는지도 더 이상 예전만큼 관심이 가지 않았다. (p.279)

그의 책을 읽고, 얘기를 듣다 보니, 음악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는 이런저런 풍파를 겪고 다시 연주에 집중하게 되었을 즈음, ‘음악은 나보다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음악에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피아니스트 러셀 셔먼과 변화경 부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됐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연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전부 다!


스승인 러셀 셔먼과 변화경의 교육법은 독특했는데요, 백혜선이 해야 했던 과제는 피아노 연습만이 아니었습니다. 흑백영화를 보고, 시를 읽고, 그림을 보고, 책을 읽고, 에세이를 쓰는 숙제를 해야 했습니다. 러셀 셔먼은 제자가 써온 에세이에 ‘이건 적합한 단어가 아니네!’ 하며 빨간 작대기를 그어 돌려줬다고 하죠. 책에 나온 그의 말을 옮겨봅니다. 
 
“연주자한테 연주 말고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어요…”
“연주자한테 연주 말고 필요한 것은 전부 다(everything)야! 자네가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까지 모두. 음악에서 연주는 아주 일부에 불과하네. 음악을 이루는 것은 1퍼센트의 음악적 요소와 99퍼센트의 비음악적인 요소라네.” (p. 120-121)

사모바르라고 불리는 러시아 주전자를 조사하고 글로 쓰는 ‘괴상한’ 숙제를 내준 일화도 인상적입니다. 가르치는 학생에게 이런 숙제를 내줬다는 얘기는 러셀 셔먼이 쓴 ‘피아노 이야기’에도 나옵니다. 
 
‘러셀 셔먼 선생님이 사모바르를 수식하는 형용사를 적어 가지고 와’, 하셔서 제가 ‘둥글다’ 이런 단어부터 시작해서 또 뭐가 있지? 이러다가 밤을 새워가며 주전자를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랬더니 관능적이다, 여자 모습을 닮았다, 등등 여러 가지가 나오기 시작하더라. 

이렇게 해서 가져갔더니 선생님께서 ‘응, 음악이 바로 이런 거야. 곡을 칠 때 네 마디 여덟 마디 정도를 관능적으로 쳤을 때, 웃기게 쳤을 때, 철학적으로 쳤을 때, 아무 감정 없이 쳤을 때, 이런 식으로 스무 번 이상 고쳐서 치면서 어떻게 치는 게 너한테 가장 와닿는지 생각을 해봐’ 하셨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내가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표현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 
 
음악이란 소리라는 언어로 듣는 사람의 마음과 영혼, 두뇌를 자극하는 것이다. 연주자 본인이 자기 대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다. 여기서 이해란 대개 언어로 하는 것이다…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언어를 다양하게 알고 있는 연주자일수록 느낌과 인상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 더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p124) 

그는 자신도 선생님한테 배운 대로, 학생들에게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연주자는 진지한 관찰과 영속적인 공부가 필요한 직업이라고 강조했고요. 

러셀 셔먼과 변화경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뚝뚝 묻어나는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역시 이 선생님들의 제자인 손민수 교수 생각도 나더라고요. 손민수 교수도 커튼콜에 출연했을 때 러셀 셔먼과 변화경 선생님 얘기를 했거든요. 백혜선은 ‘손민수가 정말 스승을 많이 닮았다’고 했습니다. 러셀 셔먼에게 배운 손민수, 손민수에게 배운 임윤찬. 계보가 그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가장 못생긴 발부터 내밀어라”

백혜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 솔직함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미국에서 생계형 피아니스트로 고생했던 시절 이야기, 아이들 데리고 투어에 나섰다가 완전히 망쳤던 연주회, 너무 어려워서 피해 다녔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실력 있는 후배 피아니스트들을 보고 느끼는 위기감, 등등 쉽게 꺼내기 힘들 것 같은 이야기들이 이어졌으니까요.  

백혜선은 자신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 나가기 몇 달 전, 러셀 셔먼에게 받았던 가르침을 들려줬는데요, 책 서문에도 나옵니다. 바로 ‘못생긴 발부터 내밀어라’는 가르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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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문화전문기자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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