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의 ‘붉은 공주’…“작가에게 감옥보다 좋은 학교는 없다”

이유진 2023. 2. 1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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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인터뷰][한겨레S] 인터뷰
‘라틴 문학의 큰 별’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멕시코 현대문학 거두로 손꼽히는 작가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은행나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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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제 소설 <아이리스>가 출간된다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아침마다 수영을 하면서 한국 여성들을 만나 친구가 되었어요. 운동이 우리를 연결해주었지요. 한국 여성들은 강인해요. 모든 방면에서 뛰어나고요.”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의 거두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91)는 전자우편으로 한국어판 출간 소감을 전해왔다. 그의 장편소설 <아이리스>가 최근 번역돼 나왔다. 포니아토프스카는 가장 멕시코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문학을 선보이는 소설가 중 한명으로 일컬어지지만 한국어로 소개된 장편은 <별과 사랑>(2008) 한권뿐이었다. 이번 작품은 작가의 어린 시절 체험을 바탕으로 해 포니아토프스카의 삶과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길잡이로서 중요하다.

문단의 ‘붉은 공주’

1932년 프랑스 파리 태생인 포니아토프스카는 멕시코 귀족 집안 출신 어머니와 폴란드 왕가 혈통의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족 혈통이지만 자신의 ‘부당한 고귀함’에 물음표를 던지며 좌파적 견해를 갖고 사회비판적인 글쓰기를 해온 까닭에 ‘붉은 공주’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를 점령한 나치를 피해 10살 때 어머니의 나라 멕시코로 건너간 포니아토프스카는 미국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돌아온다. 20대 때부터 멕시코 유력 일간지 <엑셀시오르>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온갖 부조리 속에서 고통받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취재했다. 특히 그가 쓴 논픽션 <틀라텔롤코의 밤>은 1968년 10월2일 멕시코 군경이 학생 시위자들에게 발포해 수백명이 사망한 사건을 묘사한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시위 참가자, 목격자, 생존자 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을 내려던 출판사는 폭파 위협 속에 출간을 강행했고, 그 뒤 이 책은 멕시코 저널리즘의 고전이 되었다. 1979년 여성 최초로 국가 저널리즘상을 받은 포니아토프스카는 81살이던 2013년엔 스페인어권의 노벨문학상으로 일컬어지는 세르반테스 문학상을 받았다.

<한겨레>와 주고받은 전자우편에서 포니아토프스카는 “기자로 일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세상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었고 소설가로서 단단한 글쓰기를 익혔다”고 말했다.

“저는 언론계에서 오래 일했습니다. 처음 기자가 됐을 때 제 동료는 거의 남성들이었죠. 여성이라고 해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던 것 같군요. 저널리즘은 제게 놀라운 것들을 가르쳐줬습니다.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제가 인터뷰한 모든 사람의 이야기는 제 문학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몇 안 되는 여성 기자 대부분이 결혼식과 칵테일 같은 가정 영역의 기사를 쓰던 때부터 지금까지 포니아토프스카는 60년 넘게 사회부 취재를 고집했다. 특권층 여성이었던 그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교도소에 수감된 한 수감자의 초대 편지를 받은 것을 계기로 우정을 쌓았다. 교도소에 수감된 범죄자와 정치범 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면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그는 종종 작가가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감옥보다 좋은 학교는 없다”고 말한다고 했다.

“감옥은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정말로 훌륭한 학교랍니다. 제가 만난 수감자 중에 헤수스 산체스 가르시아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가 제게 면회를 부탁해서 저는 막내아들을 데리고 면회하러 다녔는데, ‘일요일에는 공원에 가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아이는 이렇게 말했어요. ‘아니요. 우리 엄마는 저를 데리고 감옥에 가요’라고요.”

현실의 여성을 다룬 이야기

소설 <아이리스>를 두고 작가는 “여성들 중심의 공동체 안에 신성모독을 일삼는 한 사제가 침범하여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성장소설인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10대 여성 마리아나다. 프랑스 파리에서 멕시코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난 마리아나는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 속에 가족을 따라 운명의 길로 접어든다. 아버지 카시미로는 전장으로, 어머니 루스와 마리아나 그리고 동생 소피아는 멕시코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평탄하게 귀족의 삶을 이어가는 듯 보이던 이들 가족 앞에 노동자 계급 출신의 신부 자크 퇴펠이 나타나며 모든 것이 달라진다. 신부는 귀족 여성들의 삶을 비판하며 온실 속 화초처럼 편안하게 살기보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도구가 되도록 여성들의 숨은 열정을 자극한다.

마리아나는 정의로워 보이는 퇴펠 신부를 흠모하게 되지만 사제로서 결격 사유를 지닌 퇴펠의 진실이 드러나면서 여성 공동체는 충격에 빠지고 마리아나의 어머니 루스 또한 큰 타격을 입는다.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성장통의 혼란 속에 놓인 마리아나의 모습은 멕시코 출신이지만 멕시코인 또는 프랑스인 공동체 양쪽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경계인’ 어머니의 정체성과 겹친다. 마리아나는 이런 사건을 겪으며 주변의 ‘이방인 여자들’의 운명과 사랑을 다시금 발견하게 되고 고통과 슬픔 속에 한 단계 성장한다. 작가 포니아토프스카는 마리아나처럼 “저 역시 제가 속한 사회에서 일반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다.

“저는 역사적 격동 속에 살아온 소설가로서 타인을 관찰하는 한편, 저 자신 또한 들여다봅니다. 제 소설은 제 경험을 담은 이야기인 동시에 멕시코의 특정 시기를 그려낸 이야기이며 제가 아는 사람들과 제가 관계 맺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죠.”

멕시코 기층 여성들이 처한 현실은 포니아토프스카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페미니스트 기자이자 작가로서 멕시코의 일하는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동등한 임금을 받기를 원한다고 노작가는 거듭 밝혀온 바 있다. 신자유주의와 팬데믹 상황 속에서 더 빈곤해지고 폭력에 노출되는 여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은가 묻자 그는 “좋은 교육이 인간을 구원한다”며 멕시코의 여성 시인과 인권운동가들을 소개했다.

“멕시코에는 스페인어권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 있습니다.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1648~1695)가 바로 멕시코 여성이지요. 꽤 오래전부터 예술과 인권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는 멕시코 여성들이 많습니다. 라틴아메리카 페미니즘 문학의 불씨를 댕긴 시인 로사리오 카스테야노스(1925∼1974), 인권운동가이자 첫 여성 대선 후보였던 로사리오 이바라 데 피에드라(1927~2022)처럼요. 그 밖에도 페미니스트 인류학자인 마르타 라마스(1947~ ), 1985년 멕시코시티 대지진 당시 방직공장이 무너지면서 드러난 여공들의 처참한 노동환경을 고발하며 정부에 맞섰던 활동가이자 재봉사 에방헬리나 코로나(1938~2021)도 있습니다. 이들이 앞으로 좀 더 알려진다면 좋겠군요.”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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