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8] 무거운 재난이 무고한 시민을 덮쳤을 때, 무력감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 삶에 대한 회의가 마음속을 가득 채웁니다. 튀르키예에서 벌어진 대지진을 보면 든 생각입니다.
문명의 눈부신 발전에도 인간은 자연의 힘 앞에 무너집니다.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신의 자리에 올라선 인간’이라는 자찬은 얼마나 알맹이가 없는 말인지를요.
인류는 재난 속에서도 한 발자욱씩 발걸음을 디뎠습니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시나브로 희망을 개척해나갔지요.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이야기입니다. 오늘 사색은 인류가 대지진에서 일궈낸 희망의 꽃을 소개합니다. 튀르키예 지진 사망자를 추모하는 마음으로요.
1755년, 성(聖)의 수도가 무너졌다
“로마의 몰락 이후 서구 문명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참사”.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난이었습니다. 그날은 11월 1일 ‘모든성인대축일’(All Saints‘ Day), 유럽에서 가장 성스러운 도시로 통한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였습니다. 모든 신앙인이 경건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습니다. 가톨릭을 위해 한 몸 희생했던 성인들을 기리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의 한명은 성직자였던 가톨릭 신앙 도시 리스본은 더없이 평화로웠습니다.
가족들은 성당에 갈 채비를 갖추고 있었지요. 아가들은 꼬까옷을 입고 엄마에 미소를 지었을 테고, 부모들은 아가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벅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전 9시 40분. 굉음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땅이 쩍 갈라지고, 가족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모래성 마냥 무너졌지요. 남녀노소 모두 생존을 위한 절규가 시작됐습니다. “신이시여, 제발 살려주소서.”
성당도 구원의 공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미사가 열리는 성소(聖所) 역시 지진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성체(聖體)도, 십자가도, 예수님을 그린 성화도 맥없이 쓰러졌지요. 제대에 놓인 촛불이 목재로 옮겨 붙어 화마가 신도들을 덮쳤습니다.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공간에 펼쳐집니다. 지독한 아이러니였습니다.
티치아노도, 루벤스도, 지진과 해일에 휩쓸려
“달려야 한다, 바다로 가자.”
생존자들은 건물의 잔해 속에서 구원을 찾았습니다. 리스본은 해양 도시였습니다. 바다만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지요. 속절없이 무너지는 도시 안에서는 생명의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시의 젖줄이었던 바다로 향했습니다.
리스본의 모든 생명이 해안에 모였습니다. 자식의 손을 잡고 먼지를 뒤집어 쓴 사람들, 노인을 부축한 젊은 부부, 미사를 집전하는 성직자, 주인 옆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까지. 그러나 그곳에도 신은 없었습니다. 대지진이 만들어낸 쓰나미가 해안가를 덮쳤지요. 지진 발생 40분 후였습니다. 지진으로 죽거나, 불에 타 죽거나, 해일에 휩쓸려 죽었습니다. 악인과 선인,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은 무차별 대학살이었습니다.
리히터 규모 9.0. 사망자는 4만명. 리스본 전체 인구 25%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건물의 85%가 파괴됐지요. 포르투갈이 자랑하는 마누엘 양식(후기 고딕)의 건축물도 재앙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큰 왕립병원이었던 ‘호스피탈 레알 데 토도스 오스 산토스’도 화마에 휩쓸렸습니다.
대지진 7개월 전에 문을 연 리스본 오페라 하우스(Opera do Tejo)도 불에 탔습니다. 250년 동안 왕의 거처였던 리베이라 궁전도, 가톨릭 성지였던 리스본 대성당도 지진과 쓰나미로 파괴됩니다. 인류의 지식과 예술이 담긴 7만권의 도서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포르투갈이 소장하고 있던 르네상스 화가 티치아노, 루벤스, 코레조의 작품도, 대항해 시대를 이끈 바스코 다 가마의 탐사기록도 볼 수 없게 됐지요.
신의 장난인가···언덕에 놓인 집창촌은 살았다
“신이시여, 정녕 이것이 당신의 뜻입니까.”
지진은 끔찍한 상흔을 남겼습니다. 리스본 중심지를 초토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포르투갈 최남단 알가르베에서도 무너진 집과 성당이 여럿 목격됐습니다. 충격파가 북유럽의 핀란드까지 전해졌을 정도입니다. 영국 남부 해안의 콘월 지방에서도 3m 높이의 쓰나미가 닥쳤다지요. 지질학자들은 이 지진으로 대서양 건너 브라질까지 쓰나미가 닥쳤다고 보고합니다. 진앙에서는 얼마나 끔찍한 재앙이 펼쳐졌을지 감히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독한 아이러니가 있었습니다. 리스본에서 유일하게 멀쩡한한 지역 하나, 그곳의 이름은 알파마였습니다. 바로 집창촌이었지요. 성스런 도시 리스본에서 유일하게 죄악으로 가득찬 지역만이 화를 면했습니다. 일반 시민과 성직자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에 자리를 잡은 덕분이었습니다. 고도가 높았기에 지진의 충격파에서 멀어질 수 있었고, 쓰나미를 피하기에도 좋았지요. 신의 장난이었을까요. 악마의 농간이었을까요.
지독한 재난 속에 과학과 철학이 꽃을 피우다
“신이 있다면, 성당은 무너뜨리고, 집창촌은 살린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지독한 역설이 사유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신이 모든 일을 주재하신다”는 가르침에 철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삐뚤어진 인간을 향한 신의 심판”이라는 성직자의 목소리를 철학자들은 더 이상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의 자리에 이성을 놓았습니다. 지진의 원인을 ’신의 섭리‘로 보지 않고, 원리를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지진 이론을 정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과학의 용어로 지진을 설명하려는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후대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독일 과학 지리학과 지진학의 시작”이라고 평했습니다. 물론 책의 내용은 뜨거운 가스로 가득찬 거대한 동굴의 이동이 지진을 불렀다는 둥 황당한 이론으로 가득합니다. 다만, 칸트 이후로 학자들은 이성과 지성으로 분석하기 시작했지요.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신께서 그림자처럼 세상 만사를 관장하고 계신다’는 신정론(神正論)을 공격합니다. ‘리스본 대지진에 관한 시( Poeme sur le desastre de Lisbonne)’가 대표작입니다. 볼테르는 신의 존재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신이 있다면, 리스본의 성당을 무너뜨리고 집창촌을 온전하게 둘 수 있겠느냐”는 메시지였지요. 전 유럽이 그의 사상에 열광합니다. 프랑스 사상가 디드로도 리스본 지진을 “우연한 지질학적인 사건”으로 규정했습니다.
최악의 재난 속에서도 빛났던 정치
“죽은 자를 묻고, 산 사람에겐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절망 속 리스본에는 그러나 ’사람‘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국왕 주제 1세가 총리이자 폼발 후작이었던 카르발류와 힘을 모았습니다. 총리는 시신을 처리해 전염병을 막고, 이재민 구호에 나서야 한다고 주제 1세에 보고합니다. 왕은 총리에 전권을 맡기지요.
주제 1세는 폐허 속에서 약탈·방화 행위를 일삼는 야수 같은 자들을 처벌합니다. 도시 곳곳에 교수대를 세워 30명을 본보기로 목매달았지요. 선을 바로 잡고, 악을 벌함으로써 도시를 재건하고자 했던 셈입니다.
리스본의 리더들은 ‘재난’을 그저 불운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같은 재난이 다시 도시를 덮치더라도, 단단한 대응책으로 맞설 요량이었습니다. 카르발류 총리는 전국 모든 교구에 설문지를 돌립니다. “지진은 얼마나 오래 지속됐는가”, “바다나 연못, 강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가”, “땅이 갈라진 곳에서 어떤 특이점이 있었는가” 등을 물었지요. 기록은 분석을 낳고, 분석은 지식을 잉태합니다. 오직 지식만이 재난을 막을 길이라는 걸 이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험블린의 말처럼 “세계 최초 지진에 관한 객관적 설문조사”였지요. 이때의 설문 결과는 포르투갈 국립문서보관소인 토레 도 톰보에 소장돼 있습니다.
2023년 튀르키예가 1755년 리스본의 길을 걸으려면
리스본은 한 달 만에 재건 계획을 발표합니다. 왕국 수석 엔지니어인 마누엘 다 마이아가 설계한 폼발린 양식이었습니다. 건물 벽에 완충재 형식으로 목재를 넣고 사이를 회반죽으로 채우는 형식입니다.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인 리스본의 코메르시우 광장도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과거 리스본은 가톨릭으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대지진 이후 리스본을 세운 건 건축학, 도시공학, 그리고 인간의 지식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왕주제1세와 총리 카르발류의 지도력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리스본 대지진을 ”유럽 근대화의 출발점“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재앙은 때론 큰 진보를 낳았음을 역사가 증명합니다.
대지진이 튀르키예를 다시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건물의 잔해 속에서 망연자실한 어린아이의 눈빛에서는 허망함만이 느껴집니다. 따뜻한 공간에서 글 쓰는 일조차 사치로 여겨지는 요즘입니다. 부끄러운 마음을 담아 소망합니다. 1755년 리스본 부활이 2023년 튀르키예에서도 일어나기를. 대재앙을 겪은 아이들의 영혼이 다시 환하게 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