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썬’, 그해 여름 아빠의 촉감[MD칼럼]

2023. 2. 1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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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동의 씨네톡]

영화가 시작되면, 캠코더를 작동시키는 소리와 함께 빛바랜 영상들이 스크린을 채운다. 20여 년 전 튀르키예에서 아빠 캘럼(폴 메스칼)와 보낸 소피(프랭키 코리오)의 여름이 재생될 참이다. 남매 사이로 오해받을 만큼 나이 차가 크지 않은 부녀,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아빠 캘럼은 고향인 스코틀랜드를 떠나 런던에 자리를 잡으려 애쓰는 중이다. 대신 종종 딸과 휴가를 보내는 것으로 아빠로서의 소임을 조금이나마 채운다. 죽이 잘 맞는 부녀는 기억에 남을 휴가를 만들기 위해 매일 즐거운 일들을 계획하고 실천한다. 하지만 11살이 된 소피에게 이번 휴가의 아빠는 그동안과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물안경

샬롯 웰스 감독의 ‘애프터썬’은 햇빛처럼 따사롭고 물결처럼 출렁이며 심연처럼 아득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캠코더에 녹화된 영상으로 아빠와의 11살 유년 시절 휴가를 회상하는 소피는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버린 아빠의 흔적을 떠올린다. 물속에서 놀던 소피는 아빠에게 물안경을 달라고 부탁한다. 아빠는 분명히 던져줬지만, 소피는 그 사실을 모른다. 물안경은 깊은 물 속으로 사라진다. 부녀의 소통은 종종 이렇게 어긋난다. 아빠는 지금 알 수 없는 불안과 우울에 빠져 있다. 소녀는 31살 어른이 어떤 일로 힘들어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지켜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힌 아빠의 마음을.

유년의 기억

캘럼은 아내와 이혼하고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를 떠나 살고 있다. 딸이 유년의 기억을 묻자, 특별한게 없다고 답한다. 아마도 캘럼은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유년의 좋았던 기억이 없는 캘럼은 멀리 떨어져 사는 딸을 불러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다. 정서적으로 정착할 곳이 없었던 캘럼은 감당하지 못하는 깊은 우울과 슬픔의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소피가 한 유적지에서 관광객들에게 부탁해 아빠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를 때, 캘럼은 아무런 반응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생일 축하가 낯설었을 것이다. 우울의 덫은 그렇게 일상의 작은 기쁨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노래와 춤

휴가지에서 소피는 노래방 기기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아빠와 같이 부르기 위해 신청했지만 캘럼은 왜 자신의 허락도 없이 신청했냐며 화를 낸다. 대신 캘럼은 춤을 좋아한다.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것을 즐긴다. 딸과 아빠는 노래와 춤 사이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그 작은 균열은 딸이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의 내면세계다. 아빠는 다른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춤은 군중 속에 섞여 혼자 즐길 수 있다. 캘럼은 영화의 마지막에 빛과 어둠이 명멸하는 춤의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햇볕에 탄 피부

영화 제목 ‘애프터썬’은 애프터썬크림이라는 뜻으로 햇볕에 탄 피부에 바르는 크림을 일컫는다. 아빠는 튀르키예의 작열하는 태양으로부터 딸을 보호하기 위해 정성껏 애프터썬을 발라준다. 이 영화는 캠코더에 찍힌 영상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대부분이 모호하게 전개되지만, 아빠가 딸을 무척 사랑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건 아빠가 남긴 자필 메모에도 남아있다. 아빠의 사랑을 가장 선명하고 오래 기억하는 것은 딸의 등에 애프터썬을 발라주던 아빠의 손길이었을 것이다. 침대에 앉아 오래된 캠코더를 꺼내 본 소피는 아빠의 촉감을 느끼며 추억을 되살린다.

소피는 앞으로 그 촉감의 힘으로 살아갈 것이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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