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마라톤 잃었지만 韓 살린 벨기에 6·25 참전용사

김태훈 2023. 2. 1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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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런던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한국 육상선수와 기량을 다툰 벨기에 선수가 있었다.

둘 다 금메달을 목표로 뛰었으나 고난의 레이스 끝에 벨기에 선수만 동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유엔군사령부가 10일 공개한 벨기에의 육상선수 겸 6·25전쟁 참전용사 에티엔 가이의 사연이 한국인의 심금을 울린다.

2차대전으로 한동안 쉰 올림픽이 1948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됐을 때 그는 벨기에 국가대표팀 선수로 금메달을 노리며 마라톤 종목에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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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런던올림픽 출전한 벨기에 마라토너
한국 선수 최윤칠과 경합한 끝에 동메달 따내
6·25전쟁 발발 후 동생과 나란히 자원해 참전
동생은 전사… 본인은 다쳐 마라토너 꿈 접어

1948년 런던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한국 육상선수와 기량을 다툰 벨기에 선수가 있었다. 둘 다 금메달을 목표로 뛰었으나 고난의 레이스 끝에 벨기에 선수만 동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그렇게 ‘우연한 조우’에 그칠 뻔했던 이 벨기에 선수와 머나먼 신생국 한국의 인연은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터지고 벨기에가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을 결정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1948년 런던올림픽 마라톤 종목에 벨기에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한 에티엔 가이(오른쪽).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동시에 6·25전쟁 참전용사다. 유엔사 SNS 캡처
유엔군사령부가 10일 공개한 벨기에의 육상선수 겸 6·25전쟁 참전용사 에티엔 가이의 사연이 한국인의 심금을 울린다. 유엔사에 따르면 달리기를 잘하고 또 집념이 남달랐던 가이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40년 조국 벨기에가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아 점령되는 충격적 경험을 한다. 나치 치하의 조국을 탈출해 영국으로 건너간 가이는 영국 정부의 후원을 받는 벨기에 저항조직(레지스탕스)에 들어가 공수부대원 교육을 받았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기로 연합군의 반격이 본격화했고, 가이는 조국 벨기에의 해방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후 가이는 육상선수 중에서도 가장 힘든 마라톤 선수가 되었다. 영국에서 군사훈련을 받을 때 장시간 쉬지 않고 달리는 연습을 반복한 결과였다. 2차대전으로 한동안 쉰 올림픽이 1948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됐을 때 그는 벨기에 국가대표팀 선수로 금메달을 노리며 마라톤 종목에 출전했다.

마라톤 레이스엔 한국인 경쟁자도 있었다. 훗날 대한육상연맹 고문을 지낸 최윤칠(1928∼2020) 선수가 주인공이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장거리 달리기에 두각을 나타낸 최윤칠은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이 처음 출전하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 조국의 품에 안기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런던으로 향했다.

벨기에의 6·25전쟁 참전용사 형제인 에티엔 가이(왼쪽)와 동생 피에르 가이. 동생은 전사했고 형은 다리를 크게 다쳐 마라토너로서의 경력을 포기해야 했다. 유엔사 SNS 캡처
시합 전에는 가이보다 최윤칠이 훨씬 더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결과적으로 페이스 조절 성공 여부가 승패를 갈랐다. 38㎞ 지점까지 선두로 달리던 최윤칠은 너무 무리한 나머지 갑작스러운 근육 경련이 발생했고, 안타깝게도 기권을 선택했다. 그 최윤칠을 앞질러 새롭게 1위로 부상한 이가 바로 가이였다. 그런데 그도 결승선을 눈앞에 두고 그만 다리가 풀려 버렸다. 뒤따르던 2명의 선수가 순식간에 그를 추월했다. 아르헨티나 선수가 금메달, 영국 선수가 은메달을 차지했다. 아쉽지만 그래도 혼신의 힘으로 레이스를 완주한 가이는 동메달을 목에 거는 데 만족했다. 순위와 상관없이 그에겐 ‘런던올림픽 최고의 영웅’이란 찬사가 주어졌다.

2년 뒤인 1950년 6월25일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벨기에는 이웃나라 룩셈부르크와 합쳐 700여명 규모의 혼성부대를 편성해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시켰다. 이에 가이는 친동생이자 같은 공수부대원인 동생 피에르 가이와 나란히 자원해 한국으로 떠났다.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벨기에·룩셈부르크 6·25전쟁 참전기념비. 당시 두 나라는 700여명 규모의 혼성부대를 편성해 한국에 보냈으며, 미 육군에 배속돼 싸웠다. 동두천시 제공
1951년 1월 부산에 상륙한 벨기에·룩셈부르크 혼성부대는 미 육군 3사단에 배속되어 임진강 전투, 학당리 전투, 잣골 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쳤다.

하지만 전선 투입 2개월 만인 그해 3월 동생 피에르는 타고 가던 비행기가 적에 격추돼 전사하고 만다. 형 가이 본인은 2년 뒤인 1953년 3월 전투 도중 지뢰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쳤다. 이에 관해 유엔사는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였던 가이는 전쟁 기간의 부상으로 마라톤 선수로서의 꿈을 영영 접어야 했다”고 소개했다.

유엔사에 따르면 6·25전쟁 기간 벨기에는 연인원 3498명의 병력을 한국에 파견해 그중 104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도 336명에 달했다. 연인원 100명을 파병한 룩셈부르크도 15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엔사는 “벨기에·룩셈부르크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며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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