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들썩했던 ‘건군절’의 그늘…주민에 물자, 공장에 軍위문 강요해 “인권 유린” 비판만

박준희 기자 2023. 2. 11.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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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인민군 창건일 ‘정주년’ 맞아
주민·기업소에 軍지원 지시한 당국
지원금 낼 돈도 없는 공장 직원들은
공장이 먼저 내고 내달 월급서 공제
엠네스티 “주민 40% 영양실조인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인민군 창건일(건군절) 75주년인 지난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을 쌍안경으로 보고 있다. 왼쪽은 리병철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오른쪽은 김덕훈 내각총리. 연합뉴스·조선중앙TV 화면 캡처

지난 8일 인민군 창건일(건군절)을 맞아 북한에서는 각종 기념연회와 열병식 등 떠들썩한 행사가 이어졌다. 특히 올해는 북이 중요시 하는 ‘정주년(열이나 다섯을 단위로 의미 있게 맞이하는 해)’에 해당하는 75주년이었기 때문에 북한 내부적으로는 더욱 법석이 일었다는 내부 증언이 나온다. 이에 국제인권단체들은 북한 당국의 인권 유린을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9일(현지시간) 자유아시아방송(RFA)에 따르면 함경북도의 한 주민 소식통은 지난 8일 “오늘 어랑군내 각 공장 기업소들이 자매 관계를 맺고 있는 인민군 군부대를 방문했다”며 “공장 간부들과 핵심 당원, 혁신자로 인민대표단을 무어(꾸려) 군부대를 방문할 데 대한 중앙(북한 당국)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이달 초 중앙으로부터 인민군 창건 75주년을 맞아 기관, 공장, 기업소들이 자매 관계를 맺고 있거나 자기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를 방문해 군인들을 고무 격려할 데에 대한 지시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우리 공장에서는 군인들에게 줄 위문품 준비를 위해 종업원들이 비누, 치약, 수건, 노트, 수첩, 원주필(볼펜) 등 세면도구와 필기도구 중에서 한두 가지씩 바치도록 했다”며 “(종업원들이 바친)그것을 모아 3개 지함(종이박스)분의 지원품을 만들었고 군인들에게 먹일 떡 10kg, 빵 5kg, 두부 20모를 공장 측이 따로 준비했다”고 전했다.

RFA는 북한의 각 기관, 공장, 기업소, 학교들이 군부대와 자매 관계를 맺고 군을 지원하고 있다며 이같은 자매 관계는 ‘우리 공장 우리 초소’ ‘우리 학교 우리 초소’ ‘우리마을 우리 초소’ 등의 명칭으로 불린다고 소개했다. 과거에는 군 창립일에 각 공장, 기업소, 지역에서 인민대표단을 꾸려 군부대를 방문하고, 반대로 군부대도 군사대표단을 조직해 해당 기관이나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난이 가중된 지난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인민대표단만 군부대를 방문해 지원물자를 전달하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양강도의 주민 소식통도 “군 창립일을 맞아 오늘(8일) 우리 기업소도 지원물자를 준비해 군부대를 방문했다”며 “군대 창립 75돌을 맞아 군에서 각 기관, 공장, 기업소들이 방문해 도와야 할 군부대를 정해줬다. 각종 지원물자와 함께 명절 음식을 꼭 해갈 데 대한 지시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원물자 준비를 위해 우리 기업소에서는 모든 종업원이 (북한 돈) 2000원(약 0.24달러)씩 바쳤다”며 “그 돈으로 세면도구와 필기도구 같은 지원물자와 떡, 두부 등 명절 음식을 준비했는데 낼 돈이 없는 사람들은 다음 달 월급에서 공제하기로 하고 기업소가 먼저 돈을 댔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군 지휘부에 대한 비판도 제기했다. 그는 “신문, 방송에서는 인민군대가 김정은의 영도를 받는 ‘백두산 강군’이라고 자화자찬 하지만 군인들이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힘들게 군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며 “그러다 보니 능력이 되는 주민들은 어떻게 하든 자기 자식을 군대에 안 보내려 한다”고 말했다.

지난 7일 열린 북한 인민군 창건일(건군절) 기념연회에 참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앞줄 왼쪽), 딸 김주애(〃가운데). 연합뉴스

공장이나 기업소 뿐만 아니라 북한 당국은 일반 주민들에게도 물자 강요를 한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평안남도의 한 주민 소식통은 지난 5일 RFA에 “인민군 창건절을 맞으며 안주시에서는 인민반 세대별로 내화 5000원(약 0.6달러)을 인민군대 지원금으로 거둬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지난해에도 군 창건절을 맞으며 주민들에게 군대 지원금으로 내화 2000원이 부과됐다”며 “그런데 올해는 지난해 군대 지원금의 두 배 이상 늘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는 인민군 창건 정주년을 맞는 해여서 군대 지원사업을 통 크게 벌리라는 중앙의 지시가 하달되면서 주민 세 부담이 가중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함경남도의 한 주민 소식통은 “이달 초부터 중앙에서는 주민대상으로 인민군 창건 75주년을 맞으며 인민군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자는 사상교양사업을 전 군중적으로 강화하고 있다”며 “이에 함흥시 당국은 여유가 있는 주민들은 쌀이든 돈이든, 돼지든 충성심을 가지고 군대지원물자로 바치라고 연일 선전선동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거주지역에서도 5000원씩의 군 지원금 납부가 이뤄지고 있다고 밝힌 이 소식통은 “주민들은 장사가 안 되어 가족이 먹을 쌀도 해결하기 힘든데, 장마당에서 쌀 1kg을 살 수 있는 5000원이 어디에 있냐며 반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일 밤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올해 건군절의 피날레 격인 야간 열병식이 펼쳐 뒤, 국제 인권단체인 국제엠네스티는 RFA에 이메일로 북한에 대한 비판 입장을 밝혔다. 엠네스티는 “북한이 과시적인 열병식을 준비하고 있지만, 북한 주민의 40% 이상이 광범위한 식량 불안 속에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며 “북한에서의 인권 유린 행위의 규모와 심각성은 국제 사회의 관심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북한 당국은 그들의 학대를 감추기 위해 정보와 통신을 막는 등 극단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며 “북한 당국은 유엔과 협력해야 하며 독립적인 인권 감시단의 입국을 허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북한이 지난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개최한 인민군 창건일(건군절) 75주년 기념 야간 열병식에 등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연합뉴스

다른 인권단체에서도 열병식에 대한 대북 비판이 쏟아졌다. 세계기독교연대(CSW)도 이날 RFA에 “김정은이 주민들의 안위보다 통제를 선호하고 세계를 위협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며 “열병식은 김정은이 고조되고 있는 북한의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보단 군사비 지출을 선택한 또 다른 예”라고 지적했다. 휴먼라이츠재단(HRF)도 “대규모 열병식은 북한 독재정권의 잔혹성을 확인시켜준다”며 “인구의 40% 이상이 만성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는 나라에서, 영하의 기온 속에서 장시간 많은 군중들이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혐오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워싱턴의 북한인권위원회(HRNK)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도 “열병식은 북한 정권이 주민들의 안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잘 보여준다”며 “30년 동안 북한은 주민들의 인권을 희생하면서 핵·미사일 개발을 지속해왔다. 쓸모없는 열병식을 위해 계속 북한 주민들의 인권, 식량, 보건을 희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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