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봣수다] 제주경찰청 33년 지킨 가위손…"도지사도 내 단골"

오현지 기자 2023. 2. 1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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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경찰청 이용원 이발사 김동호씨…수십년 미용봉사도
1년 후 경찰청 영업 종료할 수도…"식구로 대해준 경찰에 감사"

[편집자주] [만나봣수다]는 우리의 이웃, 가족, 친구의 이야기를 뉴스1제주본부가 찾아가 들어보는 미니인터뷰입니다. 유명인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소소한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그 누구든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만나봣수다는 '만나봤습니다'의 제주어입니다.

지난 9일 경찰청 이용원 앞에 선 김동호씨. 2023.2.11/뉴스1

(제주=뉴스1) 오현지 기자 = 구 제주경찰청 청사 쪽문에는 이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이발소의 상징인 빨강, 파랑, 흰색 삼색등이 사시사철 돌아간다. 간판도 없는 이곳의 이름은 정직하게도 '경찰청 이용원'이다.

무겁고 엄숙한 경찰청사 가장 뒤편에서 서걱서걱 정겨운 가위소리를 내는 터줏대감은 바로 이발사 김동호씨(67)다. 벌써 33년간 이곳에서 경찰과 공무원, 경찰청장과 제주지사, 도민들의 머리를 만지고 있다.

세월은 흘렀지만 경찰청 이용원 문을 열면 수십 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손으로 쓴 가격표부터 손님들이 직접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바르는 공간, 김씨가 타일을 이어 붙여 만든 세면대, 늘어진 가위와 면도칼들이 정겹다.

옛날 이발사들이 대개 그랬듯 김씨 역시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가위를 들었다. 아침 먹으면 행복하고, 점심 굶으면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17살의 일이었다.

"제가 서귀포 남원 출신인데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니 정말 죽지 않기 위해 미용을 배웠죠. 친구가 먼저 이발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친구가 이 일하면 최소한 굶어 죽진 않을 거라 해서 시작했어요."

제주시 서사라에서 이발소 생활을 했던 그는 1991년 경찰청에서 먼저 이용원을 운영하던 지인에게 이곳을 넘겨받았다.

지난 9일 김동호씨가 제주경찰청 이용원에서 30년 단골손님 김철연씨의 머리를 자르고 있다. 2023.2.11/뉴스1

도청과 바로 맞붙은 경찰청사에 있는 이용원인지라 김씨는 역대 제주지사와 군수, 제주경찰청장 대부분의 머리를 전담했다. 현직 오영훈 지사 역시 20일에 한 번씩 이곳을 찾아 머리를 정돈한다.

정년퇴직 경찰관과 공무원 단골도 여럿이다. 이용원에서 만난 30년 단골손님 김철연씨도 퇴직 공무원이다. 퇴직한 지 10년도 넘었지만 1시간 남짓 걸리는 서귀포 자택에서 이곳까지 매번 거르지 않고 찾는다.

웬만한 친구보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만큼 그가 김씨를 부르는 호칭도 '우리 동호 사장'이다.

그는 "우리 동호 사장만큼 멋쟁이가 없다"며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동호 사장처럼 30년 동안 변하지 않고 매번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없다. 이런 이발소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서적으로 좋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의 말마따나 김씨는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손님에게 속사포로 감사 인사를 쏟아낸다. 인사도 손님의 그날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를 정도다.

김씨는 이날 이용원을 찾은 손님 중 한 명에게는 "가족들과 좋은 시간 보내세요"라고 인사했다. 주말부부인 손님이 서울로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라서다. 항상 바쁜 손님에겐 "건강 챙기세요", 자식이 결혼하는 손님에겐 "행복하게 잘 살게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인사를 전한다.

제주경찰청 이용원 내부. 2023.2.10/뉴스1

자칭타칭 '행복전도사'인 그는 소문난 봉사왕으로도 유명하다. 봉사 경력이 50년 미용경력과 맞먹을 정도다. 고향 산간부락에서 시작한 미용봉사는 20년 전부터는 이용원이 없는 도내 농어촌 지역과 요양원·경로당까지 범위를 넓혔다.

일주일에 단 하루 일요일이 그의 유일한 휴일이지만 그날은 쉬는 날이 아닌 봉사를 위한 날이다.

"미용 처음 시작하고 고향 아프신 분들 이발해드리며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봉사에 눈을 뜨게 됐죠. 봉사라는 게 같이 섬기는 것 같아요. 제가 이발해드리고, 어르신들은 고맙다고 해주시고요. 과거에는 천한 직업이라고들 했는데 내가 배운 이 기술로 누군가를 섬길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김씨의 이러한 선행이 알려지자 지난해에는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공식 초청됐고, 최근에는 익명의 인물이 그를 국민포장 대상자로 추천하기도 했다.

사실 김씨 이용원은 제주경찰청이 지난해 12월 노형동 신청사로 자리를 옮겨 앞으로 1년 후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커졌다. 당초 이용원도 함께 신청사로 옮겨갈 것으로 기대했지만, 공간 부족 문제 등으로 경찰에서 난색을 보였다고 한다.

30여 년을 이어온 생업을 마무리하게 될 지도 모를 시점에 아쉬운 말이 먼저 튀어나올 법도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경찰 조직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거듭 강조했다.

외부인인 자신을 가족으로, 동료로 여겨준 제주경찰에 대해 얘기할 때 '감사하다'는 단어가 가장 많이 튀어나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경찰청에서 이발하면서 30년 동안 좋은 사람들이 있어 행복했어요. 항상 인간적인 동료로 대우해주고, 행사가 있을 때 밥도 같이 나눠 먹고…. 그 긴 세월 동안 한지붕 아래서 지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언제나 식구로 대해준 것에 많이 감사합니다."

oho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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