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류 세계에도 ‘공짜 배움’은 없다

이세인 이화여대 행동생태연구실 연구원 2023. 2. 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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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긴팔원숭이. 이화여대 행동생태연구실 최아현 제공

“흥미롭게도, 자바긴팔원숭이 가족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의 사회적 학습을 했다. 각 가족의 막내들은 치밀하게, 엄청난 집중력으로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배웠다.”

-2021년 2월 18일, 필드에서 작성한 일기 중 발췌-

영장류가 단체 생활을 하며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가는 수십년간 중요한 연구 주제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의 연구는 규모가 큰 단체 생활을 하는 영장류에 집중돼 왔다. 규모가 작은 단체 생활을 하는 영장류의 사회적 학습은 아직 많은 것들이 베일에 싸여 있고, 특히 사회적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긴팔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 자바긴팔원숭이 세 가족 사회적 학습 비교해보니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인도네시아 할리문국립공원에 서식하는 야생 자바긴팔원숭이 세 가족(A, B, S)을 따라다니며 각 가족의 가장 어린 개체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학습하는지에 관한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했다.

야생 자바긴팔원숭이들은 하늘을 덮을 정도로 나무들이 빽빽한 열대우림에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조건을 갖추고 실험할 수 있는 사육 영장류 연구나 비교적 관찰하기 쉬운 다른 야생 영장류 연구처럼 진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 특별한 연구 방법을 고안해냈다.

자바긴팔원숭이들이 먹는 열매들을 섭취 난이도에 따라 1, 2, 3단계로 나누고, 어린 개체들이 먹기 어려운 열매를 섭취할 때 누구를 가까운 거리(1m 이내)에서 관찰하고 그로부터 어떤 사회적 정보를 학습하려 하는지 조사했다. 결과는 가족마다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A 가족의 막내 아자입은 한마디로 ‘엄마 껌딱지’였다. 젖을 떼기 전인 1살 남짓 아자입이 어느 날엔 엄마 아유와 함께 뜨릅이라는 나무 열매가 있는 먹이 나무에 있었다. 뜨릅은 마치 두리안처럼 생겼는데, 그 크기가 매우 커서 먹기 난이도 3단계로 지정한 열매다. 호기심 많았던 아자입은 엄마 품에 안겨서 뜨릅 열매를 고사리 손으로 떼어먹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힘도 기술도 부족해 연달아 실패한 뒤 지쳐버렸다. 그때 엄마 아유가 능숙하게 이빨로 외피를 먼저 떼어내고 손으로 그 안에 있는 과육을 먹기 시작했다. 이를 본 아자입은 이빨을 활용해 뜨릅 외피를 뜯어내려고 시도했다. 물론 또 다시 실패했지만 중요한 것은 아자입이 엄마의 행동을 관찰한 후 이빨을 이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날카로운 이빨이 먹이를 먹는 데 더 효율적이라는 정보를 사회적으로 학습한 결과다.

엄마 아유는 평소에도 아자입을 보물처럼 안고 다녔다. 덕분에 아자입은 엄마 옆에서 많은 것들을 배운 것으로 보였다. 아자입은 젖을 떼고서도 먹기 쉬운 열매를 먹을 때나 그 반대일 때나 엄마와 3m 이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길었다. 다른 가족과 비교되는 A가족만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B 가족의 가훈은 ‘알아서 잘 크자’였던 것 같다. 그만큼 부모와 형제들이 막내에게 쿨했다. 하루는 엄마 께띠가 빠끼스 끄라스라는 열매가 달린 나무에 먼저 건너가 있었다. 막내 끈등은 나무 사이 거리가 멀어 쉽게 따라 뛰지 못하고, 엄마와 거리가 멀어지자 안절부절 못했다. 보통 이런 경우 엄마가 돌아볼 법 하지 않나 생각하겠지만, 엄마 께띠는 그저 끈등이 있는 나무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별로 신경 안 쓰인다는 듯 나뭇가지에 앉아 쉬면서.

몇 분이 지나고, 용기가 생겼는지 끈등이 빙빙 돌아서 마침내 엄마가 있는 나무에 도착했다. 쿨한 엄마를 둔 끈등은 먹이 행동을 학습하기 위해 엄마에게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난이도가 높은 먹이를 먹을 때 엄마뿐만 아니라 작은 형 꼬멩과 아빠의 곁에서 행동을 관찰하는 모습을 보였다.

S 가족은 관찰한 세 가족 중 가장 화목했다. S 가족 막내 스띠아는 형제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학습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먹기 난이도가 3단계인 열매가 달린 나무에서 작은 형 산하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형을 관찰했다. 작은 형 다음으로는 큰 형, 엄마, 아빠와 시간을 보냈다. S 가족은 다른 가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형제들끼리 놀이 시간도 자주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형제 관계가 매우 돈독하다는 증거였다.

이처럼 사회적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고 가족 중심의 작은 그룹을 이루는 영장류 세계에서도 상황에 따라 학습 대상을 선택하고 선호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가족이니까 무조건 나이가 가장 많은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울 것이라는 예측은 섣부를 수 있다는 뜻이다.

크기가 크고 외피가 두꺼운 뜨릅은 필자가 섭취 난이도를 3으로 지정한 먹기 어려운 열매다. 어린 자바긴팔원숭이들은 먹는 방법을 다른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보고 배우기 위해 애쓴다. 이화여대 행동생태연구실 이윤정 제공

● 영장류가 긴 청소년기를 보내는 이유

이처럼 동물에게 사회적 학습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때로는 다른 개체와의 사회적 교류 없이 혼자 도전하거나 새로운 것을 탐험하면서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 배우기도 하지만(비사회적 학습), 대체로 단체 생활을 통해 학습을 한다(사회적 학습). 특히 먹이의 위치, 종류, 독성 여부 등 생명에 지장을 주는 위험 정보나, 인지 기술을 사용해 먹이를 찾고 먹는 방식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

영장류가 다른 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청소년기를 보내는 이유 역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학습해 성체 수준의 능숙도를 달성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영장류는 ‘연장된 청소년기’ 동안 나이가 더 많거나 먹이 행동 또는 사회 기술이 숙련된 개체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학습하려고 애쓴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고 해서 더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럴 확률이 높기 때문에 대체로 부모나 성체 개체들의 행동을 보고 배운다.

물론 모든 영장류에게 학습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관찰 당하는 개체도 고군분투하며 지금의 생존 스킬을 익혔을 텐데, 다른 개체가 쉽게 보고 배울 수 있게 마냥 내버려둘 리 없다. 영장류학자들은 종별로, 그리고 그룹별로 사회적 관용 정도를 조사한다. 사회적 관용이란 먹이가 있는 장소 등 경쟁적인 상황에서 동종의 다른 개체가 가까이 있어도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고 그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회적 관용이 높을수록 사회적 학습을 할 수 있는 확률 역시 높아진다. 혹자는 먹이가 제한되면 어떤 영장류든 먹이를 독차지하려고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마모셋처럼 협동 육아를 하는 경우 오히려 높은 사회적 관용을 보여준다. 다른 개체와 친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추후 육아나 먹이 나무를 찾으러 갈 때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사회적 관용은 생활 환경, 처한 상황, 속한 그룹의 구성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김대호 그림

● 엄마의 품을 떠나 전략적으로 학습하기

사회적 학습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3가지 포인트는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다. 사회적 학습을 위해 관찰하는 대상은 나이대별로 다르다. 영장류는 젖을 떼기 전까지 보통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많다. 랑구르, 마모셋, 개코원숭이, 여우원숭이, 마카크원숭이, 침팬지 등 대다수의 영장류들이 이른 청소년기까지 최대 80%의 시간을 엄마와 보낸다.

엄마에게 배우는 내용은 다양하다. 오랑우탄의 경우 자식이 엄마의 먹이 기술을 똑같이 배운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영장류들은 털을 고르거나 싸울 때처럼 사회적 상황에서도 붙어 있는 엄마의 행동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일본 마카크원숭이의 경우, 모계에 따라 개체별로 몸에 붙어 있는 기생충 알을 제거하는 털 고르기 기술이 달랐다고 한다.

인간의 경우도 사회적 학습 초창기에는 엄마의 영향이 지대하다. 엄마가 수유를 전담하기 때문이다. 젖을 떼고 나면 아빠나 형제 자매 등 그룹의 다른 구성원들과 보내는 시간이 증가한다. 부모로부터 받은 정보나 기술에는 한계가 있기에, 더 능숙한 개체가 있다면 그를 보고 학습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함을 알고 행하는 전략적인 행동이다. 오랑우탄은 다른 그룹에서 이민 온(?) 개체가 새 기술을 선보이거나 먹이를 찾는 데 능숙하면 그를 따라 배운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성체가 되고 다른 그룹으로 독립한 뒤에도 사회적 학습은 계속 이어진다.

이처럼 사회적 학습은 종별, 나이대별, 상황별, 집단별로 다양하다. 자바긴팔원숭이가 보인 사회적 학습 특성이 사회적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여우원숭이 세계에서도 나타날까? 한 종의 연구를 다른 영장류 종들과 비교하면 그 안에 숨겨진 진화적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필자소개

이세인. 이화여대 행동생태연구실 영장류 연구팀 소속으로 현재 스위스 로잔대 방문 연구원으로 머물며 영장류 인지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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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2월 [이세인의 ‘미지의 유인원’] 영장류 세계에도 ‘공짜 배움’은 없다

[이세인 이화여대 행동생태연구실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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