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살조차 깎아먹는 ‘식인 자본주의’···자본의 무차별 ‘폭식과 파괴’[책과 삶]
낸시 프레이저 지음·장석준 옮김 | 서해문집 | 336쪽 | 1만9500원
사회·정치·자연 전 영역에 걸쳐
자본의 무차별 ‘폭식·파괴’ 다뤄
사회 비판과 정체성 정치 융합한
프레이저의 학문적 여정 ‘결정판’
마르크스는 말년에 말했다. “내 생애에 자본주의가 이렇게 급속하게 발전할 줄 몰랐다.”
그가 겁먹은(?) 이후에도 자본주의는 광폭 질주를 거듭했다. 우리가 “문명의 발달”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코로나19는 회복할 수 없는 위기와 지속 가능한 발전이 불가능함을 고지하는 누적된 경고장이다.
낸시 프레이저의 <좌파의 길-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의 요지는 자본주의의 재인식, 자본주의관의 확장이다. 당대 자본주의는 우리가 아는 그 자본주의가 아니다. 책의 첫 쪽은 “당대 끔찍한 자본주의 사태를 심층 탐사하여 원인을 진단하고 범인을 지목한다”로 시작한다. 이 책의 핵심적 쓸모는 기존의 계급 환원주의와 구조주의적 접근을 넘는 포괄적(comprehensive) 접근이다. “범인”은 다중적이다. “심층 탐사”는 묵시록에 가까운 당대 자본주의가 인종, 젠더, 생태, 국가, 정치 시스템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논쟁은 정의나 공정보다는 자본주의관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책은 저자와 독자의 위치성 차이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몸에 금세 달라붙는다. “내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기에 이런 고통을…”이라는 일상의 하소연에 실감나게 응답하기 때문이다.
식인 자본주의 개념은 후기 식민국가 한국 사회에 절실하다.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를 근대성의 일환으로 보고 ‘제대로 된 자본주의’를 달성해야 할 목표로 상정한다. 이 작은 나라에서는 자유주의자조차 ‘좌파’로 몰리거나 자처한다. 그래서 한국어 제목이 다소 우려스럽다. 원제는 <식인 자본주의 : 현재 시스템은 어떻게 민주주의, 돌봄, 지구를 집어삼키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Cannibal Capitalism : How our System is Devouring Democracy, Care, and the Planet - and What We Can Do About It) 이다 .
좌파도 좌파의 길도 우리에겐 불가능했다. 식민 콤플렉스로 인한 발전주의에의 갈망(추격 자본주의), 외세를 핑계로 한 안보 이데올로기, 정치와 경제에 대한 협소한 문해력. 이 세 가지는 북한을 포함, 한반도 어디에도 없는 좌파를 만들어 대국민 협박 정치로 작동해왔다. 공론장은 애초에 압류되었다.
자본주의를 근대화로 보는 한국서
정의·공정 논쟁 넘는 ‘다른 길’ 제시
인류의 일상, 생애, 생명(세 단어의 영어 표기는 모두 ‘life’이다)을 완벽하게 장악한 당대 자본주의는 “한계 없는 자본주의, 절대적 자본주의”(지그문트 바우만), 경계(警戒, 境界)와 비상 상태의 임의적 설정을 의미하는 “호모 사케르”(조르지오 아감벤) 등으로 개념화된 바 있다. 프레이저의 식인 자본주의는 더욱 적확하다. 그는 비유라고 했지만, 비유가 아니다.
식인 자본주의는 백인이 흑인을 사냥한 유럽 제국주의의 역사로부터 출발하여, 자본주의가 자기 자신을 지탱해주는 사회·정치·자연 전 영역을 걸신들린 듯 먹어 치우는 상황을 말한다. 예를 들어 무려 20년간 지속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이 패배를 인정하고 철수한 이유는 오바마 정부의 결단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더 이상 파괴할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식인 자본주의 폭식의 특징은 제 살 깎아먹기와 같은, 남김 없는 파괴이다.
식인 자본주의는 인종, 젠더, 생태, 돌봄, 재생산 영역 등 그간 정치경제학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일상적이면서 거시적인 문제를 논의의 중심에 놓는다. 사실, 이러한 입장은 이미 페미니즘이 오래전에 논의했던 이슈이다. 프레이저는 서구의 전통적인 사회 비판 이론에,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 정치를 융합(trans~)한 정치철학자로 유명하다. 이 책은 그의 학문적 여정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로부터 시작된 16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중상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19세기의 자유주의-식민주의 체제, 20세기 중반의 국가-관리 체제, 당대 금융 자본주의(123쪽)는 다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 ‘교환’이 실질적으로 ‘생산’에 의존하고 있다고 봤다면, 프레이저는 생산을 위해 더욱 감추어진 영역을 탐색한다. 비가시화된 영역은 일상의 핵심 요소이면서도 식인 자본주의가 “사소한 문제”라고 간주한 주제들이다 .
2장은 400년간의 자본주의가 노예 노동자 수급을 위한 인종주의의 역사임을 밝힌다. 오늘날의 주변부 국가, 국가 내부 식민지, 남반부 지역, 난민, 이주노동자, 국지전의 희생자는 피부색으로 한정되지 않는 인종주의가 작동된 결과이다. 국제정치는 이러한 식인 자본주의의 땔감이다.
3장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취약 분야인 젠더를 다룬다. 자본주의는 돌봄, 재생산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공적 영역의 의제에서 배제, 비하하기 위해 제도화된 가족과 성 역할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이에 한국 여성들은 비혼과 저출산이라는 혁명으로 맞서고 있다).
4장의 주인공은 가장 편리한 자본주의의 포식 대상인 “꿀꺽 삼켜진 자연”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저자는 지구를 “비인간-자연”이라고 표현한다(161쪽). 자본주의가 단순한 경제 시스템이 아닌 이유는 자본주의가 자연의 대상화를 전제, 목적 의식적 개조를 목표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다. 인류는 자연을 자기 행동의 장(場)으로 국한하고, 자연은 무한 보충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환경(環境)’이라는 말이 ‘인간을 둘러싼’이라는 의미에서 문제적인 이유다.
우리를 알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이 책은 미국에서 작년 9월 출간되었다. 6개월도 되지 않아 유려하고 정확한 번역으로 당도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가 한국에서 의외의(?) 높은 판매량을 보인 것처럼, 우리 사회 구성원의 일부가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점과 훈련된 번역자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후위기의 가해국인 ‘잘사는 나라’ 한국의 인문학 자원은 극빈이라는 사실이다. 대학은 인문학자를 양성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앞으로 한국은 자신과 자기 행위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한 괴물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사족을 더한다면, 필자를 포함해 <자본론>을 완독하지 못한 이들은 대개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 전기>를 읽는데, 최신 ‘자본론’을 쉽게 읽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정희진 여성학 박사·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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