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尹 대통령의 반도체 사랑에 누 끼치는 재정당국

정원석 기자 2023. 2. 11. 04: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반도체 사랑은 각별하다. 대선 출마 선언 전부터 서울대 반도체 연구소를 찾아 3시간 동안 과외학습을 받았다. 이때 과외선생이 지금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다. 학습효과는 “이제는 전쟁도 총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 칩으로 싸운다”는 한 달 뒤 출마 선언문으로 나타났다.

구글에서 ‘윤석열’, ‘반도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윤석열 대통령이 반도체 웨이퍼를 들고 있는 사진이 여러 장 올라온다. 인수위 시절부터 반도체 연구 단지 등을 부지런히 다녔다. 지난 5월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방한 후 첫 방문지로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을 찾았을 때도 웨이퍼에 ‘윤석열’, ‘바이든’ 이라고 서명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2조3000억원 규모 웨이퍼 공장 증설을 발표한 SK실트론 구미사업장을 찾아 “정부는 과감하게 선제적 투자를 하는 기업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은 반도체 기업 도와주겠다고 웨이퍼 들고 전국을 뛰어다니고 있는데, 공무원들은 뒷짐 지고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이렇게 싸늘하다. 국민의힘이 야당 출신 양향자 의원을 반도체특위 위원장으로 영입해 지난 연말 국회를 통과시킨 K칩스법이 공무원 때문에 누더기가 됐던 어이없는 일 탓이다.

윤석열 노믹스를 이끌어야 할 기획재정부는 반도체 투자세액 공제율을 미국과 동일한 25%로 맞춰달라는 반도체특위 제안을 거부하고, 더불어민주당이 제안한 10%보다 낮은 8%로 결정되도록 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윤 대통령의 불호령으로 기재부가 세액공제율을 최대 15%로 올리고, 신규투자에 대해서는 10% 추가 공제를 받는 수정안을 만들었지만, 미국처럼 25% 세액공제가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수정안에 법인세 최저한세율(17%)을 적용하지 않는 예외조항을 두지 않은 탓이다.

사실 반도체 투자 지원에 인색한 기재부에 대한 윤 대통령의 불호령은 처음이 아니었다. 기재부는 지난해 8월 말 발표한 2023년 예산안에서 산업통상자원부가 요구한 용인·평택 반도체 산업단지 인프라 예산 1000억원을 삭감했다가,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윤 대통령의 지시로 국회 예산 심의에서 되살리는 촌극을 벌였다. “반도체 예산을 보고도 없이 삭감했다고?”라는 질책에도, 기재부 예산실은 ‘지원이 어려운 근거’를 찾느라 부산을 떨었다.

기재부와 반도체의 악연은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도체 클러스터 용수 확보에 사활을 걸었던 SK하이닉스를 지원하기 위해 산업부는 용인과 평택을 연결하는 광역상수도망 구축 예산을 기재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기재부는 대기업을 지원할 명분이 없다면서 거부했다.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SK하이닉스의 인텔 인수를 빗대 “10조원짜리 M&A(인수합병)하는 회사가 용수로 구축비 3000억원 지원해달라고 그러냐”라는 핀잔 섞인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6월 7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 영상회의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포토마스크를 보고 있다. /뉴스1

예산, 세제 등 재정정책을 관장하는 기재부 재정당국은 대기업 지원을 금기시한다. 형평성 논리 때문이다. 나랏돈 수십조원을 공공 일자리 등에 퍼부었던 문재인 정부에서는 더욱 심했다.

2021년 반도체 공급대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반도체는 모든 산업에 들어가는 대체 불가능한 필수재”라는 이야기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홍남기호(號) 기재부에 반도체 업계의 원성이 쏟아졌다. 정권 교체 후 윤 대통령이 기재부를 향해 두 번이나 불호령을 내린 일은, 홍남기 전 부총리가 발탁한 인물들이 재정당국 핵심에 박혀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반도체 산업은 멈짓하면 몰락한다. 1980년대부터 20년 동안 D램 시장을 장악했던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1990년대말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주변부로 밀려났다. 시장진입이 10년 늦었던 삼성전자가 2000년 이후 독보적인 1등 메모리 반도체 사업자 지위를 지키고 있는것은 1990년 초반부터 디지털 전환 기술에 막대한 선제 투자를 했었기에 가능했다. 우수한 이공계 인력이 반도체 산업으로 몰린 것도 초격차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메모리 반도체 불황은 1990년대 후반 대불황에 비견될 정도로 심각하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당시와 달리 투자와 인력 확보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수 인력 확보를 위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계약학과를 만들었지만, 의대 열풍에 밀려 정원 채우기도 버겁다. ‘한순간 멈짓하다 망했다’라는 말이 남의 일이 아닐 수 있다. 한국이 반도체 생산 기지로 위상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적어도 미국 정부 수준의 세제, 예산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허투루 들으면 곤란하다.

요즘 같은 불황에 윤 대통령의 각별한 반도체 사랑은 한국 경제에 천우신조 같은 일이다. 나라살림을 담당하느라 곳간지기를 자처하는 기재부 공무원들이 대통령의 반도체 사랑에 누가 되는 일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

[정원석 경제정책부장]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