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해에 깔린 사람들, 구조될 가망 없자 “유언 전해달라”

아다나(튀르키예)/정철환 특파원 2023. 2. 11. 03: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튀르키예 대지진… 정철환 특파원 르포

10일 오전 5시(현지 시각)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지진 피해가 심각한 남부 아다나와 가지안테프, 안타키아로 향하는 O-21 고속도로. 눈까지 내려 꽁꽁 얼어붙은 도로에 새벽부터 정체가 계속됐다. 트럭과 승용차 수백 대가 긴 줄을 이뤄 속도를 늦춰야 했다. 주유소에서 만난 트럭 운전사 함자(39)씨는 “구호물자를 싣고 가는 트럭이거나 가족과 친척을 데리러 가는 차량들”이라며 “멀게는 편도 11시간 걸리는 이스탄불에서부터 온 차도 많다”고 했다. 그는 “6일 저녁부터 세 번째 왕복하는 중”이라며 “물자 부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편하게 쉴 수 없다”고 했다.

9일(현지 시각) 튀르키예 남부 하타이에서 구조대원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 틈에서 발견한 여성을 이송하고 있다. 기적 같은 구조 소식이 간간이 전해지고 있지만, 눈보라와 영하 10도의 강추위가 이어지면서 현장에선 생존자보다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매몰자 시신이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EPA 연합뉴스

현지 TRT방송은 “여진이 잦아들면서 피해 지역의 가족과 친지를 피난시키려 남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했다. 고속도로 주유소는 북새통이 따로 없었다. 적게는 50~60여 대, 많게는 100대가 넘는 트럭과 차들이 뒤엉켜 긴 줄을 이뤘지만 누구도 화내는 사람은 없었다. 튀르키예 청년 타네르는 휴대폰 통역기를 통해 “살아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빠르게 늘어나는 사망자 집계 결과가 TV 화면에 나오자 고개를 떨구고 오열하거나 탄식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서로를 안아주며 위로하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였다.

지진 발생 닷새째인 10일 오후 4시 현재 튀르키예와 시리아 양국에서 최소 2만10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됐다. 부상자는 7만8000여 명에 달한다. 지난 6일 이후 매일 5000~8000명씩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다.

기적 같은 구조 소식이 간간이 전해지고 있지만, ‘골든 타임’으로 여겨지는 72시간(3일)이 지나고 일부 지역에선 눈보라와 함께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가 이어지면서 생존자보다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매몰자 시신이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실제로 고속도로에선 영구차가 자주 눈에 띄었다. 현지에선 여전히 최대 20만명이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렸거나 갇힌 것으로 추정한다.

미 지질조사국(USGS)은 이날 새 보고서를 통해 이번 강진 사망자가 10만명을 넘길 확률이 24%라고 밝혔다. 지진 발생 직후 최초 보고서에서는 10만명 이상일 확률이 0%였고, 8일에는 14%였는데 이틀 만에 10%포인트가 오른 것이다. USGS는 사망자가 1만~10만명일 확률을 30%에서 35%로 높였다. 한국에서 파견된 ‘대한민국 긴급구호대(KDRT)’는 “현재 집계된 2만여 명의 사망자 숫자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앞으로 사망자가 크게 늘어날 것 같다”고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튀르키예 강진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체육관과 소방서, 주차장 등이 시신 안치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전했다. 튀르키예 남부 하타이주의 한 병원 야외 주차장에는 시신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유족들은 일일이 가방을 열어보고, 담요를 들쳐가면서 시신을 확인했다.

튀르키예 카라만마라슈에선 굴착기가 땅을 파는 장면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사망자 수백 명을 묻기 위한 임시 묘지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워싱턴포스트는 “앞으로 수 주간 시신 안장에만 대규모 인력을 투입해야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튀르키예 피해 현장에선 실종자 구조와 함께 이재민 대책에도 주력하는 분위기다. 튀르키예 정부는 각 부처와 군, 민간 기업 등을 총동원해 이재민을 위한 의약품과 방한용품, 식료품과 식수를 피해 지역으로 보내고 있다. 대형 텐트촌을 지어 난로와 따뜻한 국물 음식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광범위한 피해 지역과 이재민 수를 감안하면 한참 부족한 상황이다.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이 10년 이상 이어지면서 폐허로 변한 땅에 강진까지 덮친 시리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시리아에선 2011년 ‘아랍의 봄’ 여파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이듬해 반군이 제2의 도시 알레포를 장악하면서 내전이 장기화됐는데 이 알레포 지역이 강진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알레포를 포함한 북서부 반군 지역에 대한 국제사회 구호는 터키와 시리아를 잇는 바브 알하와 국경 통제소를 통해서만 이뤄져 왔으나 지진 피해로 주변 도로가 부서지면서 이 통로가 사실상 막혔다. 9일 유엔 구호물자를 실은 6대의 트럭이 피해 지역에 처음으로 도착했지만, 지진 발생 이전에 이미 꾸려진 것이라 식량 등 생필품은 거의 실리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반군 성향의 민간 구조대 ‘하얀 헬멧’의 구조대원은 NYT 인터뷰에서 “구호물자엔 기저귀가 포함돼 있었다”며 “무너진 건물에 깔려 죽어가는 아기에게 기저귀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며 눈물을 훔쳤다. 장비 부족으로 맨손과 임시로 만든 도구로 건물 잔해를 헤치는 일도 허다하고, 시신을 수습할 가방마저 부족한 상태다. NYT는 “잔해에 깔린 생존자가 희망을 버리고 구조대원에게 유언을 전하는 것이 이곳의 현실”이라고 전했다.

지난 9일 강진 피해 지역에서 70대 남성을 구조한 대한민국 긴급구호대(KDRT)는 10일에도 생존자 수색 등 구조 활동을 이어나갔다. 정부 관계자는 “아직 추가로 구조된 생존자는 없지만,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수색과 구조 활동에 총력전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구호대는 이날 하타이 안타키아 고교 인근 피해 지역을 집중적으로 수색했다. 튀르키예 측은 안타키아 고교 부근에 실종자가 다수 발생한 것으로 보고 우리 측에 이 지역 구조 활동을 특별히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의료팀은 밀려드는 부상자 치료를 위해 밤낮없이 현장을 지키고 있다. 코로나 위기 때 콧등에 반창고를 붙이고 최일선에서 투혼을 발휘한 의무 장교 김혜주 육군 대위를 비롯해 각국 의료 장교들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부상자를 보살피는 중이다.

군 관계자는 “강진 피해 현장이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처참했다”며 “특히 부상자 가운데 어린이와 여성, 노인이 많아 의료진이 별도로 치료했다”고 말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