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마을 목욕탕 살리자”… 어르신들이 쌈짓돈 모아

황규락 기자 2023. 2. 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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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후원 줄고 난방비 급등, 무료 목욕탕 문닫을 위기
9일 서울 노원구 중계동 '비타민 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친 어르신들이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려보이고 있다. 2016년 시민 600명의 기부로 설립된 이곳은 최근 후원이 줄고 난방비가 올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혜진 인턴기자

서울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 불암산 자락 백사마을.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는 곳이다. 이 마을 주민 김기분(76)씨는 요즘 마음이 편치 않다. 마을 초입에 있는 ‘비타민 목욕탕’이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비타민 목욕탕은 흔한 동네 목욕탕이 아니다. 76㎡(23평) 크기. 일반 공중목욕탕에 비교하면 10분의 1도 안 되지만 주로 기초생활수급자 노인 1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이 마을 유일한 목욕 공간이자 사랑방이다.

지난 9일 찾아간 비타민 목욕탕에는 주민 9명이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70대에서 90대까지 온 순서대로 가로 2.3m·세로 0.8m 크기 욕탕에 몸을 담근 뒤 연신 “아~ 시원하다”를 외쳤다. 3명이 앉으면 꽉 찰 정도로 좁지만 어르신들은 행복해보였다. 탕 밖에서는 서로 등을 밀어주고 비누를 묻혀가며 안부를 묻는다. “6월까지 방을 빼라네 어떡하지” “갈 데가 없는데 큰일이여...”

비타민 목욕탕을 이용하려면 각자 회원증을 갖고 출석부를 작성한다. 이곳을 운영하는 서울연탄은행 자원봉사자들이 어르신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지혜진 인턴기자

비타민 목욕탕은 1주일에 2번, 수요일은 남성, 목요일은 여성탕으로 운영한다. 요금은 무료다. 안금옥(78)씨는 “걸어서 30분 넘게 떨어진 일반 목욕탕에 가려면 차비에 목욕 값에 1만7000원은 드는데 너무 비싸다”며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목욕할 수 있는 게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저 목욕만이 목적은 아니다. 목욕이 끝나면 6.6㎡(2평) 될까 말까 한 탈의실에 둘러앉아 커피믹스 한 잔으로 카페 분위기를 낸다. 매주 목욕하는 게 “인생 최고 낙”이라는 곽오단(91)씨는 요양보호사 도움을 받아 목욕탕을 찾았다. “집에 따뜻한 물이 안 나와서 전에는 연탄불로 물을 끓여 사용해야 했다”면서 “이렇게 매주 목욕도 하고 친구들 만나 얘기도 하니 너무 좋다”고 했다.

백사마을 주민 대부분은 판잣집 단칸방에 산다. 목욕 한 번 하려면 작은 마당에서 연탄으로 솥에 물을 끓인 다음 세탁기 앞에서 찬물과 섞어가며 겨우겨우 씻곤 했다. 노인들이 많아 혼자 무거운 솥을 들기도 힘들 뿐 아니라 세탁실은 문이 따로 없어 외풍에 무방비다. 걸어서 20~30분 가면 다른 공중목욕탕이 있긴 하지만 거동도 불편한 데다 비용이 적잖은 부담이었다. 마을 간담회에서 “죽기 전 목욕이라도 편하게 하고 싶다”는 하소연까지 나왔을 정도다.

비타민 목욕탕을 이용하는 백사마을 한 할머니의 거주지는 가족이 없어 쓸쓸한 모습이다. /지혜진 인턴기자
백사마을에 거주하는 독거노인들은 한겨울 온수를 얻기 위해 솥을 얹고 연탄을 지핀다. /지혜진 인턴기자
백사마을에 거주하는 독거노인들은 "자식들을 도시로 보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서울 곳곳에서 재개발이 진행될 때마다 떠밀리다가, 이곳에 와닿았다. 어쩌면 뒤로 잊힌 이들이다. 한 노인의 집에 있는 소품들. /지혜진 인턴기자

이런 고충을 풀어주고자 지난 2016년 사회복지단체 서울연탄은행이 모금운동을 벌였다. 공사비는 6300만원. 소식이 알음알음 전해지면서 성원이 밀려들었다. 인근 초등학교 학생, 폐지 줍는 할머니, 일본 오키나와 교포까지 600여 명이 조금씩 보탰다. 그리고 2016년 11월 문을 열었다. 연탄은행 직원들도 ‘작은 기적’이라며 감탄했다.

그 뒤 4년간 주민들에게 ‘소소한 낙원’으로 자리 잡았던 비타민 목욕탕은 코로나 유행 기간 감염 우려 때문에 2020년부터 2년간 문을 닫았다가 지난해 6월 재개장했다. 운영비는 후원금과 서울연탄은행 지원으로 충당했는데 코로나 휴장 기간 후원자가 대폭 줄고 최근엔 ‘난방비 폭탄’이 터지면서 흔들리고 있다. 목욕탕 운영에 드는 등유와 가스비가 2배 가까이 오른 탓에 일단 주 4회 운영을 2회로 줄이면서 자구책을 찾고 있다.

세면대 4개와 작은 온탕 1개가 있는 목욕탕 내부. /지혜진 인턴기자

이런 사정을 어디서 들었는지 어르신들은 작은 항아리 모금함을 만들고 ‘물값’으로 쓰라며 1000원, 2000원씩 놓고 나가기 시작했다. 물을 아낀다면서 작은 대야에 받아쓰고, 목욕 시간도 30분을 넘기지 않으려 한다. 한광욱 서울연탄은행 주임은 “운영비를 메꾸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 정성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주민 김기분씨는 “비타민 목욕탕이 없었을 때는 목욕을 잘 못 해 몸이 간지러워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면서 “혹시라도 목욕탕이 문을 닫으면 정말 괴로워질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이런 ‘공공 목욕탕’은 독거노인이나 노숙자 등 취약 계층에게는 복지서비스”라며 “공중 보건과 위생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타민 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친 어르신이 입술을 바르고 있다. 오늘 그는 청춘이다. /지혜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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