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낙서로 상상해보는 타인의 삶이란

이지윤 기자 2023. 2. 11. 03:02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헌책방 한구석, 1984년 출간돼 누렇게 바랜 시인 김수영의 시집이 있다.

"춥다. 에피날(Epinal), 역전. 겨울에 집에 가야 하는지 이곳에 남아야 하는지 결정할 수가 없다. 15일간 난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 1984년 12월 3일." 보통 사람이라면 '헌책에 낙서가 있다'며 투덜댈 일이다.

서울 은평구에서 17년째 헌책방을 운영 중인 저자가 헌책 속에서 발견한 낙서와 편지의 사연에 관해 상상한 책이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헌책 낙서 수집광/윤성근 지음/312쪽·1만7800원·이야기장수
헌책방 한구석, 1984년 출간돼 누렇게 바랜 시인 김수영의 시집이 있다. 사람으로 치면 불혹 가까운 책의 맨 뒷장에 누군가 까만 잉크로 단정한 손글씨를 적어 놨다. “춥다. 에피날(Epinal), 역전. 겨울에 집에 가야 하는지 이곳에 남아야 하는지 결정할 수가 없다. 15일간 난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 1984년 12월 3일.”

보통 사람이라면 ‘헌책에 낙서가 있다’며 투덜댈 일이다. 그러나 ‘헌책 낙서 수집광’은 과거 책 주인이 남긴 작은 흔적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책 주인은 왜 프랑스 북동부의 작은 도시 에피날에 갔을까….’ 40년 전 프랑스에선 국내 도서를 구하기 어려웠으니 한국에서 책을 사갔을 것이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한겨울 기차역에서 우리말로 된 시를 읽었던 걸까.

서울 은평구에서 17년째 헌책방을 운영 중인 저자가 헌책 속에서 발견한 낙서와 편지의 사연에 관해 상상한 책이다. 저자는 대형 중고서점에서라면 훼손도서로 규정돼 매입조차 안 될 흔적 많고 사연 많은 책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속엔 비록 유명인은 아닐지라도 평범해서 더 값진 우리들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며 “흔적은 앞서 책을 읽은 사람을 상상하게 만들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고 말한다.

이름 모를 옛 주인이 책 여백에 남긴 메모는 책 본문의 어느 대목보다도 개인적이고 고백적이다. 책 내용과 당시 자신의 삶을 결부해 ‘그 순간’ 느낀 감상을 간직한다. 헌책 읽기가 남의 일기를 몰래 보는 듯한 재미를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87년 출간된 권정생 작가의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속지에 남아있는 독후감이 그렇다. 독후감은 “권정생의 동화를 읽다가 문밖에도 나가지 못한 채 울면서 하루를 보내버렸다. 삶의 바닥이 가장 맑은 물이 흐를 수도 있는 지하수로임을 그의 삶을 통해 맛본다”고 했다. 겉보기에 낡아빠진 책들이 “책을 읽고 흔적을 남기며 하루를 위로했을 평범한 사람들”을 증언한다고 생각하면 생생한 역사책처럼 다가올 것이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