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눈부시게 번듯한 오스트리아 수도 ‘빈’

경기일보 2023. 2. 1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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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계방향)①클림트의 그림 앞에서 미술 수업을 듣는 빈 어린이들 ②훈데르트바서 주택 ③제체시온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북부 이탈리아를 지배했던 광대한 제국.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하이든, 슈트라우스, 말러가 활약한 음악의 수도. 영화 ‘비포 선라이즈’. 아인슈페너. 이 정도면 짐작할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을. 지난해 어쩌다 보니 빈을 두 번 왕복했다. 여름에는 인스브루크와 잘츠부르크를 거쳐 빈까지 다녀왔고, 지난 가을에는 동유럽 여행의 시작과 끝이 빈이었다.

사실 나는 빈이라는 도시에 큰 애정이 없었다. 빈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단지 취향의 문제일 뿐. 이 도시는 내 취향에는 너무 화려하고, 깔끔하고, 질서정연하다. 거대한 제국을 통치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640년 수도로서 긴 황금기를 누렸던 도시. 몰락했으나 몰락의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곳이 빈이다. 역시 대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은 도시의 거의 모든 곳에서 몰락의 흔적을 마주하게 되는데 빈은 여전히 눈부시게 번듯하다.

아무래도 나는 무너지고 바스러지는 것들, 폐허로 남은 과거의 영광, 사라진 광휘, 이런 것들에 흔들리는 사람이어서 빈은 늘 심심했다. 과장되게 말한다면 로마의 혼돈 속으로 뛰어들고 말지 빈의 질서 속으로는 투항하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 반듯하기만 해서 살짝 지루한 모범생을 보는 것 같다. 게다가 물가도 비싸 지갑이 얄팍한 여행자를 옹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물은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러졌다는 슈테판 대성당도, 제국의 심장이었던 호프부르크 왕궁도 아닌, 영구 임대주택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였다. 환경운동가이기도 했던 건축가의 철학이 드러난 공동주택은 부드러운 곡선과 다채로운 색상으로 시선을 끌었다. 이렇게나 재미있고 참신한 영구임대주택이라니! 가우디가 설계한 카사바트요의 서민 버전 같았다.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

당연하지만 빈에도 올 때마다 나를 설레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클림트와 실레의 그림이다. 클림트의 그림은 이 도시와 잘 어울린다. 금가루를 아낌없이 뿌린 화사하고 관능적인 그림들. 그의 삶조차도 그랬다.

큰 고생은 해본 적 없이 거의 삶 내내 전성기를 누렸던 화가. 생긴 건 수더분한 동네 아저씨 스타일인데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렸고,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은 채 자유연애를 즐겼다. 거기에 더해 영원한 연인 에밀리 플뤼게까지 있었던 복 많은 남자다. 사망한 후 14건의 양육비 청구 소송을 당하기도 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키스’나 ‘유디트’ 같은 그의 대표작도 좋지만 나는 초록에 둘러싸인 작은 집들을 그린 그림을 더 좋아한다. 몽환적이며 에로틱한 클림트의 그림은 자연히 눈이 가지만 내 영혼이 이끌리는 곳은 실레다. 강렬한 선들, 어두운 색채, 기괴한 포즈들, 대범한 노출. 어딘가 뒤틀린 내면을 응시하는 것 같은 그림들이다. 서로를 존경하며 좋아했던 두 화가는 20세기 초 빈 미술의 황금기를 공유했다.

그 시절 빈에는 수많은 예술가와 철학자가 활약했다. 그림에서는 클림트와 실레, 코코슈카 같은 이들이, 건축에서는 오토 바그너와 요제프 호프만, 아돌프 로스,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 문학의 카를 크라우스나 슈테판 츠바이크, 철학의 비트겐슈타인, 의학의 프로이트, 음악의 구스타프 말러 등. 그들은 카페 센트럴이나 데멜에 모여 저항을 도모하고, 관습을 거부하고, 인간의 심연을 응시했다.

때마침 빈의 레오폴트 박물관에서는 이들이 활약하던 1900년을 주제로 한 전시가 한창이었다. 빈에서의 마지막 날은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다녔다. 걷다 보니 흰색 건물 위에 황금색 월계수 잎이 촘촘히 박힌 둥근 돔이 눈에 들어왔다. 빈 분리파의 성전 제체시온이었다. 낡은 인습에 빠져 있던 빈 미술가협회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며 결성된 빈 분리파. 귀족과 왕실, 부르주아만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예술을 추구해 노동자계급에게는 입장료도 받지 않았다는 곳. 그 시절의 빈은 지금보다 훨씬 활기찼을 것이다. 옛것과 새것, 전통과 혁신이 충돌하며 새 시대를 향해 열정을 쏟아붓는 예술가들이 있었으니.

제체시온의 지하에서 눈물을 쏟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베토벤 프리즈’를 보러 온 건 두 번째였기에. 베토벤 프리즈는 클림트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의 마지막 악장 ‘환희의 송가’를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행복을 향한 염원이 적대적인 힘을 넘어 시를 통해 이뤄지는 과정을 묘사한 길이 34m의 프레스코화 대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한 편에 헤드폰 세트가 걸려 있었다. 헤드폰을 쓰고 맨 오른쪽 벽, 행복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그림 ‘온 세상을 향한 입맞춤’ 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음악을 들었다. 노래도, 그림도 지나치게 생생했다. 귓전을 터뜨릴 듯 격렬하게 송가가 울려 퍼지고, 눈앞에는 클림트의 황금색이 빛나고 있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광채가 가득한 그림이었다. 노래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갈수록 내 감정도 격렬히 고조돼 갔다. “환희여! 신의 아름다운 불꽃이여! 온 세상에 입맞춤을!” 합창단원의 노래가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 울음이 터졌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더는 누리지 못하는 엄마 생각이 나서였다.

김남희 여행작가

삶을 향해 온몸으로 입 맞추며 살았던 엄마. 두 달 전 세상을 떠난 엄마에게 이 그림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엄마는 클림트의 그림을 좋아했을 게 틀림없다. 함께 여기 나란히 앉아 쏟아지는 삶의 환희를 누리고 싶었다. 고단한 날들에도 살아있음의 축복을 매 순간 누리며 살았던 엄마는 사라지고, 남은 생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나만 살아있는 현실이 거짓말 같았다.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렇게나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 이의 의지는 또 얼마나 경이로운지. 눈물을 멈추지도 못하고 한바탕 울고 나오니 막혀 있던 가슴 한 편이 조금은 뚫린 것도 같았다. 사람이 위로해 주지 못하는 상처를 때로는 그림이나 음악이 어루만져 주기도 한다. 나는 그 찰나의 시간을 통해서야 뒤늦게 빈의 저력을 인정하게 됐다.

그날 오후에는 오스트리아 남자와 결혼해 빈에서 사는 지인을 만났다. 그녀는 이 도시가 살수록 좋은 곳이라며 극찬했다. 잘 갖춰진 사회보장제도에 더해 이 도시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가 있다고, 여기서 살기를 잘했다고.

나는 아무래도 빈을 사랑하게 된 걸까? 때마침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 티켓을 끊으려는 걸 보니. 늦가을 아인슈페너 한잔과 함께 빈의 정취에 빠져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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