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한·일이 서로를 대하는 법

한민 문화심리학자 2023. 2. 1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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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일본에 대한 대응이 연일 도마에 오르고 있다. 1월31일 요미우리 신문은 한·일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근거해 강제동원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는 입장이 확고하다”면서 “한국 정부도 피고 일본 기업에 보상과 관련하여 직접 관여가 어렵다는 판단으로 기울었다”고 전했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과 관련한 더 이상의 보상과 사과는 없다는 일본 측의 주장에 정부는 수용적인 입장이다. 외교부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기업 대신에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판결금을 지급하는 이른바 제3자 변제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지원재단은 행정안전부 소속 기관이다. 즉 일본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우리 돈으로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같은 날 알려진 소식이다. 원전사고가 발생한 후쿠시마 인근 바닷물로 채워진 평형수가 한국에서 배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2017년 9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관할 수역 밖에서 주입된 평형수 519만9935t이 국내에 배출됐는데 이 중 후쿠시마·미야기현의 평형수는 약 12만t에 달한다.

해양수산부는 2021년 8월부터 이 두 현에서 오는 배들은 우리 해역에 들어오기 전에 평형수를 모두 교체하도록 했지만 평형수를 교체하지 않은 배들의 입항을 막지는 않았다. 평형수 미교체 선박에 대해 방사능 전수조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 해수부의 설명이다.

가해자는 보상을 거부해 피해자 측이 보상금을 내야 하고, 방사능 오염 가능성이 있는 바닷물을 우리 바다에 배출하는 이들에게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이 국가 대 국가의 공정한 외교 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의문이다.

일본의 태도는 새삼스럽지 않다. 일제강점기 이후로 일본이, 적어도 정부 차원에서,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일본이 형, 한국이 아우’라는 것이다. 메이지유신에 성공하고 아시아에서 최초로 산업화를 이룬 일본은 세계 속에서의 자신들의 자리를 확고히 하고자 했는데, 국가들 사이에는 ‘알맞은 자리’가 있다는 이러한 인식은 당대 일본의 외교문서들에서도 확인된다.

형과 아우로 요약할 수 있는 국가 간의 알맞은 자리는 강자와 약자에 대한 일본의 문화적 인식에서 비롯된다. 한 번의 승부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무사 문화에서 형과 아우란 강자와 약자를 의미한다. 강자는 약자에게 무슨 일이든 요구할 수 있고, 약자에게는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 강자와 약자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이다.

약자가 당한 일들은 그들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강자의 당연한 요구에 약자로서 응당 순종해야 할 것들이다. 강자에게는 이것을 뉘우치거나 사과할 의무가 없을뿐더러, 약자가 이에 대해 부당하게 받아들이고 사과를 요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일부) 일본인들이 한국을 혐오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동생이 건방지게 형한테 맞먹는 것은 물론 약자 주제에 강자에게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의 태도다. 최근 드러난 한국 정부의 태도는 한국을 약자로 규정하고 자기들 식의 강약논리로 대하겠다는 일본의 태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현 정부의 일본과 한국을 보는 시각이 일본에 맞춰져 있다는 뜻이거나 현 정부의 인사들이 일제강점기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지금은 일제강점기가 아니다. 현재 상황은 일본을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생각했던 과거와도 다르다. 일본과의 GDP 격차는 1965년에 무려 9배에 이르렀으나 작년 기준으로 한국이 3만3590달러, 일본이 3만4360달러로 그 차이가 거의 사라졌다. 2022년 미국 US뉴스 월드리포트가 꼽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순위에서 일본은 6위 한국에 이어 8위에 자리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생각하던 국가들 사이의 ‘알맞은 자리’는 이제 재고되어야 할 시점이며, 이는 일본의 시각으로 양국 관계를 보는 한국 정치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국민 입장에서 내 나라가 어떤 나라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이길 기대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어떤 이들은 국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지 모른다. 약자가 강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그것이 약소국의 운명이라고.

하지만 2023년의 대한민국은 누군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약소국이 아닐뿐더러, 자존을 버리고 얻는 국익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일방적으로 숙이고 들어가는 외교가 실질적으로 어떠한 국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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