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자본주의 심은 유대인 가문...그들은 왜 사라졌나 [Books]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2. 10. 19:4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
조너선 카우프만 지음, 최파일 옮김, 생각의힘 펴냄

1829년 중동 바그다드의 한 유대인 무리가 한밤중 감옥을 빠져나와 허둥지둥 도망친다. 자신들의 가문이 ‘왕족’으로서 바그다드에 정착한 지 800년쯤 지난 때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자는 유대인 무리의 수장에게 통보했다. “세금을 안 내면 아들을 교수형에 처하겠다.” 승계 과정에서의 탄압이었고, 세액은 터무니없는 초고액이었다. 무리는 길을 떠나 인도 봄베이(현 뭄바이)에 정착했다.

그러나 이후 불과 10년. 이 유대인 가문은 맨몸으로 봄베이 시내 최고 갑부로 다시 올라섰다. 중동과 인도의 최대 거점 두 곳을 총칼 없이 ‘자본’으로 정복해버린 그들에겐 이제 또 한 차례 ‘동진(東進)의 운명’이 예비돼 있었다. 바로 1842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것. 유대인의 다음 목적지는 세계 자본주의의 시험장이던 도시 상하이였다.

중국에서 거대한 기업 제국을 형성했지만, 공산당에 의해 철저히 은폐된 유대인 가문의 명멸을 들여다봄으로써 ‘세계가 중국을 다루는 방식, 중국이 세계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실마리를 주는 책이 출간됐다. 2015년 퓰리처상을 받은 저자 조너선 카우프만의 신작으로 파이낸셜타임스, 퍼블리셔스위클리, 이코노미스트, 포브스, WSJ, 보스턴 글로브, 커커스리뷰가 모두 추천한 걸작 논픽션이다.

바그다드를 탈출한 승계자의 이름은 데이비드 서순(1792~1864). 중동과 인도를 오가며 무역 사업을 확장한 그에겐 8명의 아들이 있었다. 상하이를 장악하고 중국 무역을 지배한 서순가(家)를 파트너와 경쟁자는 너나없이 ‘아시아의 로스차일드’로 불렀다. 상하이는 기회의 땅이었다. 상하이는 자본ㆍ공산ㆍ제국ㆍ민족주의가 한데 모인 도가니였고, 푸둥 가의 와이탄에 늘어선 황금빛 건물에 외국계 기업이 쏟아져 들어오는 현대식 자본주의 시험장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상하이 조계지에 자리 잡은 서순가는 아편 무역으로 번 돈을 부동산과 인프라 산업에 투자했다. 장제스의 환심을 산 데이비드는 8명의 아들 그리고 며느리를 통해 상하이에서 억만장자로 성장한다. 장제스 정부는 화폐를 안정시키고 수출 붐을 일으키기 위해 무역에 능한 서순가와 힘을 모았다.

서순가는 온 세계가 불황에 빠져들었던 대공황 시기, 난징대학살 이후 일본과 나치가 협력하던 광기의 시대에도 살아남았다. 1만8000명의 유럽 유대인이 나치를 피해 상하이로 흘러들어오자 서순가는 일본군과 교섭을 벌여 유대인을 보호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서순가가 살린 생존자 명단에는 나중에 미국 재무장관이 되는 마이클 블루멘설, 하버드 로스쿨 교수가 되는 로런스 트라이브도 있었다.

중국에 자본주의를 이식했던 위대한 유대인들은, 그러나 탁월한 정치ㆍ경제적 감각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화려한 응접실 바로 바깥에서 무르익던 ‘혁명’의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국민당 정부에 자금을 댔던 서순가는 1949년 공산당 승리 이후 모든 걸 잃었다. 아편전쟁 직후 공산당 승리까지를 ‘치욕의 100년’으로 보는 중국 정부는 서순가를 타락한 자본주의 서사로 탈바꿈했다. 이미 100년 전 마천루와 스카이라인을 갖춘 세계 4번째 도시였던 상하이에는 그들의 이름이 완전히 지워졌다.

이 책은 단지 상하이의 개혁을 일궜다가 사라진 유대인 가문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처음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을 통해 중국의 근현대 자본주의사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나아가 ‘중국이 밀어내는 세계’ 내지 ‘중국에서 벗어나는 세계’라는 화두는 오늘날에도 규제와 간섭으로 중국 땅을 떠나는 기업들, 이른바 ‘차이나 엑소더스’에 대한 이해와 해결에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특히 서문의 이런 글은 밑줄을 긋게 된다. “마크 저커버그와 스티브 잡스,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 중국과 미국의 정치적 압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심하기 훨씬 전부터 상하이, 홍콩, 봄베이, 런던에 회사를 둔 서순가는 전 지구적 경제를 주무르면서 중국과 손을 잡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정치적, 도덕적 딜레마와 씨름했다.”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