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법의 정신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2023. 2. 1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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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퇴직금 명목으로 50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나왔다. “담당 업무, 액수를 볼 때 50억원은 이례적으로 과하”지만 “아들이 받은 성과급을 곽 전 의원이 받은 것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뇌물수수에 관한 공소사실은 무죄로 판단한다.” 재판부는 일상의 상식 차원에서 볼 때 분명 50억원의 성과금은 이례적으로 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법 형식을 따라 따져볼 때 뇌물로 판단할 증거가 명백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일상의 ‘가치 판단’과 재판부의 ‘사실 판단’이 어긋난다. 이러한 어긋남은 법을 일상의 사회적 삶과 괴리된 법 기술로 보는 도구주의적 시각을 드러낸다. 법의 ‘형식 합리성’을 기술적 차원에서 세밀하게 따질 뿐 법이 사회적 삶의 ‘실질적 요구’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에는 애써 눈감는다. 사회적 삶에서 유리된 법은 현실권력에 복무하는 법 기술자의 도구로 전락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현재 한국사회에는 법 도구주의가 불러일으킨 냉소주의가 일상에 널리 퍼져 있다. 공수처법을 한번 보자. 검찰의 권력을 공수처에 나누어주면 두 기관이 경합하고 균형을 이루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것이다. 이러한 ‘순진한’ 생각은 사실 법이란 강자의 정의일 뿐이라는 ‘냉철한’ 현실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강자의 정의가 폭정으로 치닫지 않도록 그 힘을 쪼개어 서로 경합시키자. 실제로 현실화한 대가는 쓰라리다 못해 아프다. 일거리가 더 많아진 법 기술자가 정치마저 모조리 장악했다. 법 기술자는 도구적, 전략적, 냉소적 행위자다. 그에게는 법 기술을 얼마나 교묘하게 활용하여 상대방을 패퇴시켜 승리하느냐가 지상과제다. 아무리 좋은 법을 만들어도 원래 취지를 교묘하게 비틀어 자기 정파의 이득을 극대화한다. 국회선진화법과 정당명부제가 대표적인 예다. 법 기술자의 통치는 부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승인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세상으로 변할 수 없다는 냉소 바이러스를 온 사회에 퍼트린다.

사람들은 분통을 터트린다. 정치가 후져도 너무 후지다. 자기 정파 이득을 보편적 선으로 포장하는 저 뻔뻔함 좀 봐라. 시커먼 속이 훤히 다 보인다. 에잇, 소인배야! 푸념하고 정치를 멀리한다. 이렇게 되면 법 기술자는 더 좋아한다. 삐뚤어진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친 법 기술자 ‘클럽’이 주거니 받거니 정치를 제멋대로 주무른다. 기술자의 세계관은 단순하지만 자기 분야에서는 유식하다. 단순무식한 자가 통치하면 금방 허점이 들통난다. 하지만 ‘단순유식’한 자가 통치하면 다르다. 기술적으로 세련되고 촘촘해서 도전하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문제를 제기하면 단순하지만 유식한 지식을 총동원해 공방을 벌이자고 덤빈다. 그러면 그 유식한 지식이 뒷받침하는 단순한 세계의 폐쇄성에 시퍼렇게 질린다.

법 기술자가 싫다고 성직자에게 정치를 떠맡길 수는 없다. 그러면 더 끔찍한 사회가 올 수 있다. 신비한 성채에 둘러싸인 전제군주제. 그 속을 가늠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 성스러워 누구도 비판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법의 정신>에서 몽테스키외는 이에 대해 답한다. 민주주의 공화정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분명히 하면서도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자신의 좁다란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보편적인 연대를 추구할 수 있는 시민의 문화역량이 민주주의 공화정의 핵심이다. 형식 민주주의는 항상 ‘법치’를 앞세우지만, 사실 법치는 군주제의 본성이다. 법은 군주의 자의적 권력행사를 통제하기 위한 장치다. 법치가 없으면 일반인은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민주주의 공화정은 다르다. 설마,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한가? 법 기술자의 단순유식한 법치가 구축한 ‘폐쇄성’을 시민의 ‘초월적 문화역량’으로 고비고비마다 열어젖힌 역사가 한국 민주주의 공화정이 쌓아올린 ‘법의 정신’이라는 것을.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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