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지진稅’ 24년 걷어 뭐 했나

김나영 기자 2023. 2. 1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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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새벽(현지 시각) 발생한 강진으로 튀르키예와 시리아는 아비규환이 됐다. 규모 7.8 지진이 75초간 몰아친 뒤 수백 차례 여진이 이어지며 1만5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가족과 친지를 순식간에 잃은 튀르키예 국민은 정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재해 발생 사흘 만에 뒤늦게 피해 현장을 찾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이런 재난에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발언을 한 탓이다. 초대형 자연 재난 앞에 인간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겠지만, “그동안 정부는 무엇을 했느냐”는 국민의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지진 피해지역인 남부 카흐라만마라슈시에서 생존자와 포옹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날 피해 현장을 둘러본 뒤 취재진에 일부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큰 재난에 준비돼있기는 불가능하다"고 거듭 말했다. 2023.02.09 /AP 연합뉴스

이 같은 파괴적인 재난은 ‘자연적인’ 것일까.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스는 자연재해라는 용어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7일 칼럼에서 “실제 재난은 대부분 건물 부실 공사와 사고 후 무능한 위기 관리 등이 빚어낸 인재(人災)에 가깝다”고 했다. 지진 자체는 자연현상이지만 이에 대응하는 공동체의 사회적·정치적 문제가 얽혀 엄청난 피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1985년 멕시코에서 규모 8.0 지진이 발생했을 당시 멕시코 정부는 국제사회의 구호 활동을 거절하는 등 느슨한 대처로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번 지진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배경에도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사회·정치적 문제가 있다. 튀르키예 정부는 1만7000여 명이 숨진 1999년 서북부 대지진 이후 지진에 대비한다며 이른바 ‘지진세(稅)’를 걷어왔다. 지금까지 880억리라(약 5조9000억원)가 징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작년엔 93억리라(약 6200억원)가 걷혔다고 한다. 하지만 막대한 국민 혈세가 어디에 쓰였는지 아는 튀르키예 국민은 거의 없다. 튀르키예 정부는 1999년부터 내진(耐震) 설계를 강화하도록 건축 규정을 개선했지만, 이번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중엔 규정 개선 이후 지어진 것이 상당수였다. 믿음을 배신당한 국민이 분개하는 이유다.

시리아 상황은 더 심각하다. 12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이미 파손된 건물이 많았다. 지진이 발생한 북부 지역은 반군 점령 지역으로, 체계적인 행정 체계가 없어 사실상 무정부 상태다. 구호 단체 도움으로 삶을 연명하는 주민들은 지진 앞에 속수무책으로 스러졌다. 서방의 원조를 받기조차 어려운 이 나라에선 분노의 목소리조차 외부로 전해지지 않는다.

자연재해를 막을 수는 없지만, 피해를 최소화할 순 있다. “지진은 인재”라는 말은 인간의 손으로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사고 수습도, 희생자 애도도, 재난 예방도 모두 인간이 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70국이 피해 지역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전 세계 시민들의 기부 행렬도 이어지고 있다. 재난 현장에 연대의 꽃이 피어나 꺼져가는 생명을 하나라도 더 구할 수 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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