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모의 외교포커스] 길 잃은 일제 강제동원 해법

유신모 기자 2023. 2. 1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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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2일 정부가 주최한 ‘강제징용 해법 공개토론회’에서 벌어진 혼란과 소동은 이 사안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인지를 보여줬다. 토론회가 아수라장이 된 것은 예상됐던 일이라 놀랍지 않다. 진짜 문제는 이런 토론회가 너무 늦게 열렸다는 데 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이런 토론회는 2012년 5월24일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가 항소심 판결을 뒤집고 일본 기업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취지로 파기환송 결정을 내린 직후부터 열렸어야 했다. 판결의 의미·문제점·파장·정부의 대응 등을 놓고 ‘혼란스러운 공론화’가 그때부터 시작됐더라면 훨씬 쉽게 국내적 합의에 도달했을 것이고 일본도 진지하게 협의에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10년 넘게 이 문제를 회피하고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다가 실기했다.

역대 정부가 강제동원 배상 판결 문제를 다뤄온 과정은 ‘무능력·무책임 대일외교’의 극치다. 이명박 정부는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고 대통령 독도 방문, 일왕 발언 등으로 한·일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린 뒤 그 부담을 박근혜 정부에 넘겼다. 박근혜 정부는 판결의 심각성을 인식했지만 정공법을 택하지 않고 엉뚱하게 대법원의 팔을 비틀어 판결을 다시 엎으려 했다. 2018년 10월 대법원의 최종 확정판결이 나온 직후에라도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테지만, 문재인 정부는 일본의 외교협의 요청에 무응답으로 일관하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이후 강경 대응으로 돌아서고 한·일 갈등을 국내 정치에 이용함으로써 일을 결정적으로 그르쳤다.

윤석열 정부가 팔을 걷고 문제 해결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합리적 과정을 거치지 않아 곤란을 자초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해결 방안은 국내 기업의 기부금으로 피해자들에게 ‘판결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면 일본이 ‘성의 있게 호응’해 일본의 피고기업들이 기부금 조성에 참여하고 적절한 사죄 표명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일본은 피고기업이 돈을 내는 것을 거부했다. 또한 사죄 표명은 무라야마 담화, 김대중·오부치 선언 등에 나오는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는 입장이다. 설상가상으로 제3자 변제에 대한 국내적 반발이 커지자 윤석열 정부는 국내 여론과 일본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정부는 뒤늦게 ‘피고기업의 기여와 사죄 표명’이 제3자 변제의 전제조건이라고 강조하지만 일본은 받아들일 기색이 없다.

윤 대통령은 이 문제를 빨리 매듭짓고 새로운 한·일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정상회담을 한 뒤 상반기 안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국을 방문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환대를 받는다는 일련의 구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첫 단계인 강제동원 문제에 막혀 있다. 외교 일정상의 시한을 갖고 일본과 협상을 하고 있으니 이를 뻔히 알고 있는 일본을 이길 방법이 없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제3자 변제는 현실적으로 유일한 해법이다. 하지만 그 해법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과 시퀀스(수순)가 틀렸다. 강제동원 배상 판결은 법적·역사적·외교적 측면을 모두 감안해 정교하게 다뤄야 할 난제다. 일본은 제3자 변제에 긍정적이지만 이를 추진하려면 그 안에 피해자와 국내 여론이 납득할 만한 요소를 담아야 하고 대법원의 판결 취지가 반영됐다는 흔적도 남겨야 한다. 일본과의 교섭, 법적 문제 해결을 위한 피해자 설득, 야당과 진보세력의 참여 등이 함께 입체적으로 진행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정부는 혼자의 방식으로 해결을 서둘렀다. 민관협의회를 열고 피해자와 만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론을 정해놓고 진행한 요식 행위였다. 벽에 부닥친 정부는 이제 일본에 ‘기부금을 내고 사죄해 달라’고 매달리고 있다. 설령 일본이 받아준다 해도 이런 식이라면 기부금도 아니고 사죄도 아니다. 제대로 된 문제 해결이라고 할 수 없다. 정부의 섣부른 해결 시도가 현실적으로 유일한 해법인 제3자 변제를 망치고 있다.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한 한국이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끝내 고수한다면 정부는 중재위원회를 여는 방안을 검토하기 바란다. 중재위에서 승산이 높지 않다고는 하지만 한일청구권협정에 명시된 분쟁 해결 방법을 협의에 상정조차 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지더라도 중재위에서 강제동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보고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일본의 요구를 모두 수용해 국내적 갈등을 키우고 한·일 간에 앙금과 분쟁의 불씨를 남기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일 것이다.

이 기사는 경향신문 뉴스레터 점선면 3월15일자 (https://stib.ee/QWE7)에 소개되었습니다. 일제 강제동원 이슈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뉴스레터로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매주 화~금요일 점선면을 메일함으로 받아보시려면 여기 (https://url.kr/jhqy7k)에서 구독을 신청해 주세요.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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