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36] 일본과 튀르키예의 ‘형제애’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2023. 2. 1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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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튀르키예는 종종 서로를 피를 나눈 형제국이라고 부른다. 튀르키예의 6·25 파병에서 비롯된 고마움과 친근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튀 유대를 상징하는 사안이 한국전 참전이라면, 일본에서는 ‘에르투를(Ertuğrul)호 조난 사고’가 양국 관계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에르투를은 일본과 친선 증진을 위한 외교사절단 방일 임무에 투입된 (튀르키예의 전신) 오스만 제국의 군함 이름이다. 1890년 6월 요코하마에 도착해 압둘하미드 2세 황제의 메이지 천황 앞 친서를 수교(手交)하고 무사히 임무를 마친 후 9월 귀국길에 오른 에르투를호는 출항 하루 만에 와카야마현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침몰하고 만다. 승선자 656명 중 587명이 사망한 대형 해난 사고였다. 거의 1년에 걸친 항해로 선박 노후화가 심각했으나, 제국 위신을 손상하고 싶지 않았던 지휘부의 출항 강행이 참사 배경이었다.

이들의 조난 소식은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메이지 천황이 직접 나서 가능한 모든 구호 지원을 지시했고, 민간 차원에서도 언론의 관심과 지원 속에 대대적 구호 모금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정부의 발 빠른 조치로 군함 두 척이 생존자 본국 송환 임무에 즉각 투입되었고, 이들은 이듬해 1월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오스만 제국의 대대적 환영을 받았다. 민간 모금을 주도한 야마다 소유(山田宗有)가 1892년 이스탄불을 찾아 5000엔에 달하는 유족 구호금을 전달하자 다시 한번 일본의 온정이 오스만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이때 기억으로 튀르키예인들이 일본을 ‘형제국’으로 부른다고 알려져 있다.

며칠 전 지진으로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1만이 훨씬 넘는 인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이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긴급 구조팀 파견 및 구호품 제공 등 재난 극복을 위한 도움 손길이 쇄도하고 있다. 사연은 다르지만 각자 튀르키예와 ‘형제애’를 나눈 한국과 일본이 희생자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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