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유럽의 ‘이동권’ 이야기

경기일보 2023. 2. 1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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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의 유모차를 끌고 전차에 오르는 빈 시민. 김남희 여행작가

 

지난해 봄, 다시 카미노데산티아고를 걸었다. 이번에는 포르투갈의 포르투에서 시작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향하는 14일의 여정이었다. 어느날 숲길에서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걷는 여성 순례자와 마주쳤다. 오르막은 아니었지만 길이 고르지 않았다. 유모차를 밀며 걷기에는 힘이 꽤 드는 길이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쉬던 우리 일행이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초콜릿을 건네니 그녀가 환히 웃으며 받았다.

포르투갈 길은 급한 경사가 없어 쉬운 길로 꼽히지만, 숲이 많았다. 배낭만 메고 걸어도 힘든 길을 아기와 함께 오다니! 그 용감한 결단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내면의 용기에 더해 그녀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지 않았을까. 이 길에서 혼자가 아닐 거라는, 도움을 주는 선의의 손길이 있을 거라는 믿음 말이다. 그 믿음대로 그녀에게는 도움의 손길이 줄곧 이어졌다. 우리도 그녀의 유모차를 밀어주거나, 들어서 옮겨 주기도 했다. 도움을 받는 이도, 도움을 주는 이도 자연스러웠다.

우리가 산티아고에 들어선 다음날, 그녀와 아기도 타인의 친절에 기대 무사히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카미노의 정신이 오롯이 구현된 순례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하니까. 우리가 걷기에 급급해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그녀를 모른 척했다면? 제대로 카미노를 걸었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것이다. 그녀 또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로지 혼자 힘으로 걸어야 했다면 좀 서글프지 않았을까.

그녀의 이야기를 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읽은 이가 질문을 남겼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자신도 그 길을 걸을 수 있겠느냐고. 전동휠체어로 카미노를 걷는 일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스페인에는 장애인들이 카미노를 걸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체들이 있다고 했다. 전 구간은 아니더라도 카미노의 일부라도 경험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 주는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카미노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공공기관도 ‘모두의 카미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이라고 했다.

모두를 위한 카미노라니. 장애인도, 아이도, 노인도 걸을 수 있는 카미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단지 구호로 끝내지 않고, 현실화를 위해 그들은 노력하고 있었다. 갈리시아에서는 모든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숙소)가 장애인 화장실과 휠체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방을 하나씩 갖춰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 놓았다. 실제로 우리가 머문 알베르게마다 장애인 화장실이 있었고, 알베르게 안에 턱이 없어 휠체어가 이동하기에 수월했다.

빈의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노인. 김남희 여행작가

카미노가 끝난 후 나는 코로나에 걸려 스페인에 남아야 했다. 다행히 증상은 가벼웠다. 스페인은 격리 규정이 해제된 후여서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코비드 유목민이 돼 스페인을 떠돌았다.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에서는 마침 안뜰 축제(저마다 정성껏 가꾼 자기 집 안뜰을 개방하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안뜰을 공개한 집들이 표시된 지도 한 장을 들고 매일 남의 집 정원을 기웃거렸다.

지도에는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는 집들이 따로 표시돼 있었다. 작은 도시 아빌라의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지도에도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는 모든 거리가 표시돼 있었다.

비단 스페인만이 아니다. 유럽의 미술관이나 상점은 휠체어 장애인의 접근이 가능한 곳이 많았다. 공공기관은 말할 것도 없다. 미술관에서 휠체어에 앉아 그림을 감상하는 이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그 뒷모습을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아무렇지 않은 그 주변의 공기까지 부러웠다.

그들에게 시선이 멈추는 건 나에게 장애인 가족이나 벗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삶이 불가능해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 내 삶의 질을 떠올려 보면 암담해진다. 슬프게도 나에게는 믿음이 없다. 내 이웃이, 내 조국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신뢰가 없다.

나에게 가장 절실한 국가의 역할은 장애인, 성소수자, 어린이, 노인, 여성,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약자로 삶을 시작해 사회적 약자로 삶을 마감하기에. 선진국의 척도 또한 내게는 국가가 사회적 약자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해주는가, 그 사회가 약자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다.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에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호하는 나라를 꿈꾼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정당의 대표였던 이가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대해 막말 수준의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고, 언론은 아직도 “시민을 볼모로 어쩌고” 등의 헤드라인을 쏟아내는 나라이니. 선진국 진입을 자랑하는 지금에도 장애인들이 이동권 시위를 해야 할 정도로 우리는 그들에게 무관심했다. 화를 낼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김남희 여행작가

30년 전 처음 유럽을 여행할 때 의문이 들었다. 아니, 선진국이라면서 길에 왜 이렇게 장애인이 많은 거지? 인구 대비 장애인 수가 특별히 많아서가 아니었다. 인구의 10%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장애인들은 외출을 하지 못해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의 장애인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장애인을 비롯해 교통약자가 탑승할 수 있는 저상버스의 도입률은 현재 30%에 불과하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의 경우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는 시외·고속버스는 전체 노선의 4%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도 장애인들은 목숨을 버려 가며 싸워야 했다.

지난 여름, 밥벌이를 하느라 여러 번 바깥 나들이를 했다. 인천공항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올 때마다 트렁크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장애인들의 목숨 값으로 생겨난 결과물에 무임승차하며 생각했다. 비장애인이 설계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포기하는 일 없이 더 끈질지게 싸워 주면 좋겠다고.

세상은 한 번도 저절로 나아진 적은 없었다. 우리 삶의 질은 언제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소수의 사람들 덕분에 향상돼 왔다. 그들이 싸울 때 함께 선로에 드러누울 용기는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지하철이 멈췄을 때, 평생 그 지하철을 타지 못하고 살아온 누군가의 삶을 상상해보며 30분이든, 세 시간이든 기꺼이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 시위는 결국 내 미래를 위한 싸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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