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직장 내 괴롭힘' 판단이 어려운 이유

양지훈 변호사(위벤처스 준법감시인) 2023. 2. 10.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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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훈 변호사

근래에 입법된 노동 관련 법률 중 직장인의 일상적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법안은 무엇일까. 필자는 우리 작업장 문화를 바꾸고 있는 '직장내괴롭힘금지법'을 꼽고 싶다.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조항들은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노동조합법 등의 개정안에 반영돼 있다.

이 중 기본이 되는 근로기준법 제76조의2는 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를 이렇게 정의한다. '사용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이하 '직장 내 괴롭힘'이라 한다)를 해서는 아니 된다.'

기존 노동법이 임금, 근로시간, 휴게시간 등과 관련된, 주로 정량적인 부분에 맞춤한 것이었다면 직장내괴롭힘금지법의 내용은 근로자의 일상과 조직문화 같은 정성적인 부분에 초점을 둔 법안이다. 그런 만큼 법률의 내용이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현실에 적용하고 법률을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게 발생한다.

예컨대 위 조문의 내용 중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라는 요건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도 실제로는 쉽지 않다. 한 조직에서 '지위의 우위에 있는 상사'와 '관계의 우위에 있는 부하'라는 특수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상사가 조직 내에서 언제나 괴롭힘의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고 '관계의 우위'에 있는 부하 직원에 의해 괴롭힘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하급자들의 직장 내 괴롭힘이 문제가 된 최근 행정심판에서 부하직원이 '관계의 우위'를 이용한 괴롭힘의 가해자라고 인정된 사실이 있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하급자는 혼자만 괴롭힘 가해를 한 것은 아니고 다른 하급자들과 함께 그룹장인 피해자 상사를 괴롭혔는데 직급이 낮더라도 여러 명이 함께한 사정이 고려돼 관계의 우위성이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은 행위 역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은행의 일선 지점을 무대로 한 드라마 '사랑의 이해'에서 소개된 사례가 이해에 도움을 준다. 극 중 육시경 지점장은 무기계약직 텔러인 주인공 안수영에게 고객과의 식사접대를 강요하는데 수영이 이를 거부하자 그녀에게 문서고 정리를 촉박한 시일 내에 완수할 것을 명령한다. 같은 지점 근무자라면 누구나 그러한 지시를 접대거부에 대한 '업무상 보복'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 사건을 실제 노동위원회의 행정심판이나 법원의 판결로 가져가면 쉽게 속단할 수 없게 된다.

드라마에선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수영이 처리해야 하는 문서고 정리는 분명 은행 지점에서 필요한 업무임이 확실하다. 다만 지점장이 요구하는 것처럼 주말까지 이용해서 긴급히 처리해야 하는 업무상 필요성은 보이지 않는다. 업무량 또한 수영이 혼자 처리하기에는 너무 많기도 하다.

지점장이 '직장에서의 지위'나 '관계의 우위'를 이용해 수영에게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했다는 점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여기서 지점장이 수영에게 문서고 정리업무를 지시한 전후 사정과 맥락은 지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앞서 본 것처럼 지점장은 수영의 접대거부에 대한 보복성 명령으로 긴급히 필요하지도 않은 업무지시를 내린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필자가 수영의 법률대리인이라면 이와 같은 업무지시의 맥락을 강조해서 변론할 것이다.

물론 실제 현실은 더 복잡하고 애매한 경우가 많다. 조금 영리한 지점장이었다면 수영의 접대거부 의사표시 시점으로부터 시간적 간격을 두고 문서고 정리든 무엇이든 보복을 시도했을 것이다. 직장내괴롭힘금지법에 따라 각 사안과 행위에 대한 판단이 어려운 점이 여기에 있다. 여전히 이 법률은 형성되는 중이며 시간이 더 지나면 이 법률로 인해 우리 직장의 일상이 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양지훈 변호사(위벤처스 준법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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