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대장동 ‘법꾸라지’들에 기름 발라준 판결

박정훈 논설실장 2023. 2. 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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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이 아니라면
김만배씨는 왜
일개 대리급에게
거액을 주었단 말인가
‘50억 무죄’ 판결은
이 당연한 의문에
답을 주지 못한다
곽상도 전 의원이 8일 서울 중앙지법에서 열린 대장동 개발 사업 로비·특혜 의혹 관련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며 취재진 질문을 받고 있다. /뉴스1

외풍에 휘둘리지 말고 오로지 법리와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게 판사의 임무다. 법리는 법적 상식에 기반한다. 그래서 법은 ‘최소한의 상식’이라고 일컫는다. 지나치게 법리에 치우쳐 상식의 한계를 일탈한다면 그것은 사법 정의라 할 수 없다.

이른바 ‘50억원 클럽’의 곽상도 전 의원에 대한 뇌물 혐의 무죄판결은 충격적이다. 청와대 민정수석까지 지낸 현직 국회의원의 아들이 단 6년 일하고 퇴직금 명목으로 50억원을 받았다. 아버지는 돈을 준 대장동 주범과 절친한 대학 동문 사이였다. 누가 봐도 아버지를 보고 준 것이 명백했다. 그런데도 법적으로 문제없다니 상식의 허용 범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판결대로라면 앞으로 자녀를 통해 검은돈을 주고받는 신종 뇌물 루트가 유행할 법하다. 따로 사는 자녀에게 돈을 주면 아무리 액수가 많아도 뇌물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불거진 것은 2021년 9월이었다. 대장동 의혹이 쏟아지는 와중에 당시 국민의힘 재선 의원이던 곽 전 의원의 아들이 김만배씨가 설립한 화천대유의 1호 사원으로 근무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곽 전 의원 아들은 6년 근무 후 퇴사했다. 그런데 연봉 4000여 만원을 받던 31세 대리 급의 퇴직금이 무려 50억원에 달했다. 기업 경영인들의 역대 퇴직금 기록 사상 랭킹 4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참고로 역대 1위는 김용환 현대차 부회장이 2018년 퇴임 때 받은 67억원이다. 검찰은 50억원이 곽 전 의원을 보고 준 뇌물이라 보고 기소했다.

재판부도 50억원이 “사회 통념상 이례적으로 과다”함을 인정했다. 곽 전 의원의 직무 관련성도 인정했다. 그가 국민의힘 부동산 투기 특별조사위원으로 활동하던 때여서 대장동 문제가 직무 범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아들이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뇌물을 수수했다는 의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뇌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이유가 상식을 깨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곽 전 의원 아들이 결혼해서 따로 사는 ‘독립 생계’이기 때문에 무죄라고 했다. 즉 곽 전 의원이 아들을 부양하지 않기 때문에 아들이 50억원을 받아도 곽 전 의원의 경제적 부담이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곽 전 의원에게 줄 50억원이 대신 아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는 이상한 논리였다.

재판부가 제시한 법리는 세상 상식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결혼한 자녀라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심리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 주려 온갖 증여 수법을 고민하는 세상인데 재판부는 ‘따로 사니 뇌물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들이대고 있다. 역으로 말하면 독립 생계 자녀를 통하면 합법적으로 뇌물을 주고받을 길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인터넷 댓글엔 ‘자식들 주소 따로 만들어 주고 그쪽으로 뇌물 받으세요’라는 등의 야유가 쏟아지고 있다.

당장 조국 전 법무장관의 ‘600만원 유죄’와 형평성 시비가 제기됐다. 조 전 장관은 딸이 장학금 600만원을 받은 것이 청탁금지법 위반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곽 전 의원 아들은 독립 생계지만 조 전 장관은 딸을 부양한다는 차이가 유·무죄를 갈랐다. 600만원이 유죄인데 50억원이 무죄라면 누가 납득하겠나.

‘정영학 녹취록’엔 김만배씨가 곽 전 의원에게 돈을 줘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온다. “병채(곽 전 의원 아들)가 아버지에게 주기로 한 돈을 달라고 해서 머리가 아프다”거나 “병채 아버지는 돈을 달라고 그래. 병채 통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김씨는 실제로 50억원을 아들에게 주었다. 이것 이상 명백한 뇌물의 증거가 어디 있는가. 재판부는 김씨 말이 ‘허언(虛言)’이라고 보았다. 김씨가 말 한 그대로 50억원이 지급됐는데 어떻게 허언일 수 있는가.

판사로선 그 나름대로 고심 끝에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판결은 ‘50억원 클럽’ 사건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당연하고도 핵심적인 의문에 해답을 주지 못한다. 김만배씨는 왜 일개 대리급 직원에게 거액을 주었는가. 대가성 없이 주었다면 김씨는 통 큰 자선 사업가인가. 김씨가 화천대유 설립 이후 다른 퇴직 직원들에게 지급한 금액은 총 2억여 원에 불과하다. 천사 같은 김씨가 다른 직원에겐 왜 인색했단 말인가.

법 조문의 맹점을 활용해 처벌을 피해 가는 법률 기술자를 속칭 ‘법꾸라지(법률+미꾸라지)’라고 한다. 곽 전 의원과 김만배·정진상·김용씨 등 대장동 일당이 바로 그런 전술을 펴고 있다. ‘50억원 무죄’ 판결은 ‘정영학 녹취록’이 허언이라며 증거 능력까지 부정함으로써 대장동 일당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한 탕 크게 해먹고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대장동 ‘법꾸라지’들에게 법원이 기름까지 발라준 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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