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채경의 랑데부] 직접 겪어봐야만 터득할 수 있는 것들

한겨레 2023. 2. 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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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채경의 랑데부]기업의 회계 담당자든, 출판사의 편집자든, 연구소의 천문학자든, 대개는 주로 책상에 앉아 모니터나 책이나 서류 더미를 들여다보고 있다. 어떤 외계인이 처음으로 지구를 방문해 관찰 중이라면, 행동만으로 이들을 구별해낼 수 있을까? 때로는 나도 그 외계인처럼 멀리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일까?
클립아트코리아

심채경 |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음원 사이트에서 서비스 비용을 내면 노래를 내려받거나 온라인으로 들을 수 있다. 비용을 내지 않아도 곡의 앞부분 1분까지는 미리 들어볼 수 있다. 과일 가게에서 시식용 과일 조각을 제공하듯이, 개별 음원을 사려는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맛보기’ 서비스인 셈이다. 그런데 ‘미리듣기’ 서비스로는 곡 전체를 잘 알기 어렵다. 도입부는 비교적 평범하게 흘러가다가 마지막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곡은 놓치게 되고, 앞부분이 꽤 매력적이었지만 마땅히 클라이맥스랄 것도 없이 비슷한 곡조만 반복되다 끝나버리는 곡에 실망할 수도 있다.

‘미리듣기’ 기능은 곡을 만드는 데에도 영향을 줬다. 도입부에 소비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대목을 배치하고 실제 도입부는 조금 뒤로 미뤄두는 식이다. 물론 비단 미리듣기 서비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매일 전세계에서 발표되는 수많은 곡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1분이 아니라 어쩌면 더 짧은 시간 안에 분명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선택받는 데에 유리할 테니.

재빠르게 매력을 어필해야 하는 것은 영화나 방송 프로그램의 예고편도 마찬가지다. 짧은 영상으로 잠재적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제작진은 무척 고심할 것이다. 때로는 예고편 내용이 실제 영화나 방송분에는 나오지 않기도 한다. 편집으로 잘라냈지만 소위 ‘낚시’에는 유용한 장면을 예고편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심지어 예고편에 나온 배우가 실제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거나, 본래의 이야기와는 무관한 일화가 주요 사건인 양 예고편에 등장하기도 한다. 예고편에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관객의 역할을 충실히 다한 뒤다.

직업을 선택하는 일 역시 일종의 ‘미리보기’를 근거로 삼는다. 특히 미래 진로를 정하거나 어떤 직종에 처음으로 진입할 때, 우리는 그 직업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태일 때가 많다. 대중매체 속에 잠시 등장하는 특정 직업의 단면 또는 주변에서 얘기하는 내용을 ‘미리듣기’한 결과다. 어떤 경우에는 미리 훑어본 내용이 그 직업에 관한 훌륭한 요약본과 깊은 생각거리를 주기도 하지만, 실제와는 꽤 다른 엉뚱한 착각만 일으키기도 한다. 사서는 온종일 책을 읽으며 온갖 신간 서적을 두루 섭렵할 것 같고, 천문학자는 매일 밤 오지에서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우주적 통찰에 빠질 것 같다는 낭만적인 환상도 있고,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덮어놓고 비난하고 비하하는 지독한 착오도 있다.

어떤 행동을 하는지 평균을 내서 ‘섬네일’을 만들어 본다면, 책상에 앉아 일하는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은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업의 회계 담당자든, 출판사의 편집자든, 연구소의 천문학자든, 대개는 주로 책상에 앉아 모니터나 책이나 서류 더미를 들여다보고 있다. 어떤 외계인이 처음으로 지구를 방문해 관찰 중이라면, 행동만으로 이들을 구별해낼 수 있을까? 때로는 나도 그 외계인처럼 멀리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일까?

직종을 넘나드는 유사성 속에서 이들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각자가 사용하는 컴퓨터 속 폴더의 이름일 것이다. 물론 급하게 만든 뒤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아서 ‘새 폴더’, ‘새 폴더(1)’, ‘임시’, ‘최종’, ‘최종 2’ 같은 이름도 있다. 최종이면 최종이지 최종 2는 무어란 말이냐 싶은 폴더들 사이로 ‘달’, ‘타이탄’, ‘목성’, ‘토성’, ‘소행성’… 이런 태양계 천체 이름들이 있다. 그리고 직장의 규정이나 업무요령 안내서를 모아둔 ‘천문연’ 폴더가 있다.

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일상 속에서 나의 직업적 정체성은 오히려 그런 사소한 곳에서 찾을 수 있다. ‘달’ 폴더 속에 들어 있는 달 관련 자료, 벽에 붙어 있는 달 지도와 각종 관측기기 메모, 복도에 붙어 있는 세미나 공지 안내문의 배경에 자연스럽게 들어 있는 천체 사진. 그런 것들이야말로 삼각대 위에 올려진 망원경을 눈으로 들여다보는 모습보다 실제에 가까운 천문학자 ‘미리보기’ 자료다.

세상에는 직접 겪어봐야만 터득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짧은 영상이나 단편적인 사진 몇장, 글 몇줄로는 살펴보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아마도 그럴 때 좋은 자료는 일상적인 업무 현장을 따라다니며 기록한 영상이나 직업에 대한 수필일 것이다. 우리에겐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의 다양한 기록이 더 많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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