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나는 아빠의 '어린 보호자'입니다

2023. 2. 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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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많이 아프신데, 제가 아빠를 돌보면서 집안일도 하고 있어요.'

아픈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경훈(가명)이는 아버지의 유일한 보호자다. 주위에서는 경훈이를 착한 효자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경훈이는 다른 또래들처럼 평범하게 지내고 싶을 뿐이다.

지난해 말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USNWR)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the planet's most powerful countries)' 순위에서 우리나라가 전년 대비 두 계단 상승한 6위를 차지했다는 소식과 함께 어린 아들이 아픈 아버지를 홀로 돌봐야 하는 현실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엇갈려 지나간다.

해외에서는 경훈이처럼 장애·질병·약물 문제를 가진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이들을 가리켜 '가족돌봄아동청소년(영케어러)'이라고 한다. 우리 주위에는 경훈이와 같은 아이들이 많지만, 안타깝게도 정확한 실태를 확인할 수 있는 통계는 없다. 그동안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효자, 효녀로 불리거나 칭찬이나 연민의 대상으로만 여겨졌을 뿐, 이들을 사회안전망에 포함시키는 법적 용어나 지원 체계가 부재한 것이다.

다행히 정부는 2022년 들어서부터 가족돌봄아동청소년에 대한 규정, 실태조사 및 지원 방안 마련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 조사는 만 13세 이상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초등학생 이하 아동도 포함된 전체적인 돌봄 현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에 필자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는 2022년 7월 재단이 직접 지원하는 만 7~24세 미만의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가족돌봄 노출 현황을 조사했다. 그 결과 전체 응답자 1494명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686명(46%)이 가족돌봄을 하고 있다고 응답했고, 이 중 157명(23%)은 초등학생으로 나타났다. 한창 뛰어놀고 꿈을 키워갈 나이에 성인도 견디기 힘든 돌봄 역할에 내몰려 성장과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아픈 가족의 삶까지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돌봄 부담은 신체적·정서적·경제적·사회적 지장을 초래한다. 특히 경제력이 없는 청(소)년들은 돌봄 과정에서 생계비 마련의 어려움이 있고, 돌봄과 당장의 생계 활동으로 진로 및 학업 병행이 어려워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질 낮은 일자리와 빈곤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과 제도가 잘 마련돼 있다고 하는데, 그 사회적 약자 기준에 드는 것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절망스럽다.' 12세부터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를 홀로 돌봐온 한 청년이 '가족돌봄아동청소년 권리보장을 위한 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돌봄을 하게 된 순간부터 이웃, 친척, 학교, 주민센터 등 모든 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할머니를 간병하고 집안일을 하다보니 편안하게 공부할 수 없었고 충분히 놀거나 쉬지 못했다. 교우관계도 단절된 지금, 언젠가 이 돌봄이 끝났을 때 내 삶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함과 불안이 가득하다.

저출산·고령화를 일찌감치 경험한 해외 국가들은 이미 가족돌봄청년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이고 관련 법·제도·정책을 마련해왔다. 영국은 2014년 아동 및 가족법에 이들에 대한 지원 내용을 담았고, 호주는 2010년 간병인 인정법을 만들어 부양 부담으로 인한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지원하고 있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2020년 실태조사, 2021년 국가 차원의 대책 수립을 시작으로 지자체에서 순차적으로 조례를 제정·공포해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12세, 그 어린 나이부터 10여 년간 홀로 돌봄의 역할과 책임을 짊어져온 청년에게도 해외와 같은 지원 체계가 존재했다면 어땠을까. '가족이 쓰러지는 걸 경험하는 것은 재난을 겪는 것과 비슷하다' '간병에 익숙해져도 괴로움이 덜해지지는 않는다'는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아픈 가족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삶은 뒷전인 채로 살아가는 가족돌봄아동청소년들이 여느 또래들과 같은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는 더 부지런히 움직이길 바란다.

[황영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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