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녹아내리는 빙하' 유니폼 입은 스키 월드컵 최강자

권란 기자 입력 2023. 2. 9. 15:57 수정 2023. 2. 1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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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받는 동계 스포츠


'스키 월드컵 85승'이란 기록에 빛나는 미국 스키 대표팀 미케일라 시프린이 특별한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섰다. 흰색과 하늘색의 조합이 눈에 띄는 유니폼, 지난 6일 프랑스 메리벨-쿠르수벨에서 열린 2023 국제스키연맹 알파인스키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미국 대표팀의 공식 유니폼이다.

미국 스키 대표팀 미케일라 시프린 선수가 '녹아내리는 빙하' 유니폼을 입고 지난 8일 세계선수권대회 경기에 참가하고 있다.


유니폼 무늬는 바다에 떠 있는 빙하를 상징한다. 지구온난화로 점점 녹아 사라지는 빙하를 찍은 위성 사진을 기반으로 스포츠 브랜드 '카파(Kappa)'와 비영리 환경단체 'POW(Protect Our Winters)'가 제작했다. 미국 스키 대표팀은 유니폼 제작 배경에 대해 "유니폼이 기후 변화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후 변화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미국 대표팀 선수 트레비스 가농은 "국제스키연맹은 기후 위기에 초점을 맞추고 지금보다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연맹 측을 촉구하는 서한도 보냈다고 밝혔다.

2023 국제스키연맹 알파인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미국 국가대표팀 유니폼이다. 실제 위성사진을 바탕으로 녹아내리는 빙하를 형상화하였다.


대표팀 선수까지 나서 '기후 위기'를 경고하고 나선 건, 실제로 스키가 '멸종 스포츠'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최근 이상 기후로 따뜻한 겨울이 이어지고 눈 부족 사태를 겪으면서 올겨울 취소된 경기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위기감을 느끼는 건 단지 스키 단체나 선수뿐만이 아니다. '스키의 천국'으로 칭송받는 알프스 스키장들도 기후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스위스 쪽 알프스의 앙제르의 슬로프 대부분은 올겨울 개장조차 하지 못했다. 알프스에서만 문을 닫았거나, 운영은 중단한 스키장도 수십 곳에 달한다. 올겨울 알프스가 기온이 20도로 치솟는 이상 고온 현상을 겪으며 흰 눈 대신 푸른 잔디만 무성했기 때문이다. 인공 눈조차도 만들 수 없었다. 제설기는 온도가 1도 미만으로 유지돼 기계가 내뿜는 물방울이 얼고 눈 입자로 변해야 하는데, 이미 그 온도를 훌쩍 넘겼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스키장의 모습이다. 눈 부족으로 스키 월드컵 대회가 취소됐다.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의 기후연구원인 마리 캐빗은 특히 1,600m 이하 고도에 위치한 스키장은 '눈앞에 위험을 직면하고 있다'고 말한다. 캐빗에 따르면, 유럽의 저고도 스키 리조트에서는 적설량이 10년마다 3~4cm씩 줄어들고 있다. 눈사태연구소(Institute for Snow and Avalnche Research)가 2017년 내놓은 보고서에서는 지구 기온이 현재처럼 상승할 경우 알프스는 2100년까지 적설량의 70%가 녹아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도 '강 건너 불구경' 할 수만은 없는 처지이다. 지난 2018년 평창올림픽 당시 눈을 이용하는 경기장의 90%가 인공눈이었다. 지난해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도 스키 슬로프에 쌓인 눈은 100% 인공눈이었다. 지난해 영국 러프버러대 연구팀이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 추세대로 지구 온난화가 진행될 경우 2050년대에 동계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을 만한 곳은 일본 삿포로,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와 오슬로, 미국 레이크플래시드 정도뿐이다. 이런 추세가 2080년대까지 이어진다면 21세기 말에는 일본 삿포로, 단 한 곳만 남는다. 캐나다 워털루대 연구팀이 진행한 비슷한 연구에서는 첫 동계올림픽 개최지 프랑스 샤모니를 2050년에는 동계올림픽을 다시 열지 못할 '부적격지'로 분류하기도 했다. 동계올림픽 기간 평균 기온도 1920~1950년대 0.4도였던 것이 1960~1990년대 3.1도, 21세기에는 6.3도로 30년마다 꾸준히 3도씩 오르고 있는 추세이다. 워털루대 연구팀은 "기후 변화의 영향을 피할 수 있는 스포츠는 세상에 없다"며 기후 변화가 스포츠에 미치는 영향을 엄중 경고하였다.

스키는 이제 겨울 스포츠 또는 겨울 취미로만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스키의 존망 그 이면에는 인류의 생존도 위협하는 기후 위기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스키 대표팀 선수들의 유니폼은 단지 '신박한' 디자인이 아니라 '절박한' 호소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권란 기자jii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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