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에너지 ‘그린버튼’ 도입할 때 됐다

2023. 2. 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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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근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
난방비 폭탄에 소비자 무기력
전기·가스·수도 데이터 공유로
미국에선 절약과 효율화 달성
에너지 민주주의 측면도 중요
전기수요 갈수록 급증 불가피
독점 깨고 소비자 참여 높여야

한파가 계속된 이번 설에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의 화두는 단연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였다. 가스요금 인상으로 ‘난방비 폭탄’ 고지서를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민들은 벌써 이번 달 난방비 고지서를 걱정해야 하는 판이다. 도시가스 가격이 폭등한 것은, 1년 전에 시작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액화천연가스(LNG) 가격이 2배나 올랐기 때문이다.

지난해 4차례에 걸쳐 가스요금을 38%나 올렸는데도, 한국가스공사의 미수금이 9조 원에 이르며, 적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나 올해도 추가적인 가스요금 인상이 불가피해 보인다. 연료비 폭등으로 기록적인 적자(31조 원)를 냈던 한국전력 역시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전기요금 인상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줄줄이 이어지는 에너지 사태를 보면서 가격 인상을 발표하는 정부의 입만 쳐다보는 것 외에는 소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 사람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은 ‘그린버튼(Green Button)’ 제도를 통해 소비자를 에너지 생태계에 적극 참여시키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2012년에 시작한 그린버튼은 소비자가 전기·가스·수도의 사용량을 손쉽게 온라인을 통해 확인하고, 자신의 데이터를 신뢰할 수 있는 제3자와 공유함으로써 에너지를 절약하는 프로그램이다. 미국 26개 주와 캐나다의 6000만 고객을 대상으로 운영 중인데, 참여하고 있는 전력회사와 가스회사가 76개나 된다. 각 가정에 설치된 스마트 계량기가 수집한 에너지 소비 정보를 전력회사나 가스업체에 보내면, 해당 기업은 전송받은 에너지 사용 데이터를 소비자가 직접 활용할 수 있도록 가공해서 서비스한다. 소비자는 앱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에너지 사용 패턴을 분석해 낭비를 줄일 수 있다. 그린버튼 시행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만 1500만kWh의 전력소비가 줄었는데, 이는 국내에서 15기의 원전이 생산하는 전력량과 비슷한 규모다.

‘에너지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있다. 에너지를 공급하는 중앙집중형 체계가 분권화하고, 일반 시민이 에너지 생태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체제를 뜻한다. 기존의 에너지 체계에서는 정부가 정책 결정과 에너지 공급 과정에서 독점적인 권한을 누린다. 일반 시민은 에너지가 어떻게 생산되고 분배되는지 알 수가 없다. 시민은 중앙집중형 위계 시스템의 말단에 있는 소비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비자에게 에너지 사용에 대한 정보가 전혀 전달되지 않아,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미국의 그린버튼 제도는 정보 공유를 통해 소비자를 에너지 생태계에 참여시키면 에너지 효율이 크게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앞으로 탄소중립 정책이 가속화하게 되면 에너지 민주주의는 더욱 중요해진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가스와 같은 난방연료를 전기로 대체하는 ‘전기화(Electrification)’가 필요하다. 난방을 위해 수요가 늘어나는 전기도 온실가스 배출이 없는 재생에너지로 만들어야 한다. 태양광이나 풍력발전과 같은 재생에너지는 에너지 구조가 중앙집중형이 아닌 분산형이다. 소비자는 지붕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로 직접 전력을 생산하고 그 편익을 나눠 갖는 ‘프로슈머’(Prosumer·제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소비자)로 바뀐다. 이전에는 중앙정부가 에너지 공급 과정에서 독점적 권한을 행사했다면, 에너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소비자의 역할이 커진다. 제공되는 정보를 활용해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용하고 남는 에너지를 판매하는 것과 같은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직면한 에너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우리도 ‘한국형 그린버튼’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가정이나 빌딩, 공장과 같은 장소에 스마트 계량기를 설치하고, 에너지 공급자와 소비자가 양방향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에너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비자가 에너지 생태계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독점적인 권한을 일반 시민에게 이양하려는 열린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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