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좋은 일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반려견과 매일 6km 8000보 걸어”[100세 시대 名士의 건강법]

박현수 기자 2023. 2. 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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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세 시대 명사의 건강법
- 정진우 한국영화복지재단 이사장
25세 최연소 영화감독 데뷔 후
54편 연출, 135편 제작 ‘전설’
집·사무실 반려견 18마리 키워
50년 넘게 친 골프 홀인원 3번
베스트스코어, 이븐파 프로급
마음 편하게 가져야 건강해져
“돈은 없으면 안 쓰면 되는 것”
원로 영화감독 정진우 한국영화복지재단 이사장이 지난 7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서고 있다.

글·사진 = 박현수 기자phs2000@munhwa.com

한 분야 최고의 명장을 우리는 ‘전설’이라 일컫는다. 영원한 영화인 정진우(87) 한국영화복지재단 이사장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끌어 온 전설적인 감독으로 불린다. 1962년 최연소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후 지난 60여 년간 한국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지금까지 총 54편을 연출했고, 자신이 설립한 영화사 우진필름을 통해 총 135편을 제작하며 세계가 주목하는 K-시네마 기초를 닦았다. 그는 한국 영화의 질적 향상과 정통성을 온몸으로 견인해 온 강골 영화인이다.

정 이사장은 데뷔작 ‘외아들’에 최무룡·김지미·황정순·태현실 등 당대 톱스타들을 대거 출연시키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듬해 ‘배신’을 감독해 ‘청춘콤비’ 신성일·엄앵란 시대의 서막을 열어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패티 김이 주제가를 불러 더욱 유명해진 ‘초우(草雨)’를 비롯해 대종상 9개 부문을 휩쓴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대종상 6개 부문을 수상한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이 그의 대표작품으로 ‘히트 제조기’로도 불렸다.

1972년 섬마을 농구팀 이야기를 담은 ‘섬개구리 만세’가 베를린영화제 본선 경쟁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1984년 연출 겸 제작 작품인 ‘자녀목’으로 제42회 베니스영화제에 특별 초청되며 한국영화가 세계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계기를 만들었다. 강수연이 ‘씨받이’로 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 것이 그 이듬해였으며 1989년 제1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도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그의 숨은 공로가 컸다.

우락부락한 생김새만큼이나 추진력이 강해 ‘충무로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으며, 거침없이 내뱉는 언행이 부메랑이 돼 오해를 사거나 충돌하는 사건도 있어 큰 손해를 보기도 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식사 도중 다퉈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미완성 대작 ‘여명의 눈동자’를 연출, 제작할 때는 고위 권력층의 특정 배우 캐스팅 압력을 외면한 괘씸죄에 걸려 촬영현장에서 교도소로 끌려가 수감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14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의 회고록 출간기념회에 참석한 원로 영화감독 정진우 한국영화복지재단 이사장이 문화일보와의 인터뷰 도중 지난 날을 회상하며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

1984년 영화인들의 복지를 위해 설립한 한국영화복지재단이 있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무실에서 지난 7일 만났다. 인터뷰는 앞서 지난해 10월 14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의 회고록 출간기념회장과 12월 5일 영화복지재단 이사장실에서도 진행했다.

이날 사무실 입구에서 눈 위에 점이 두개 있어서 네눈박이라 불리는 검은 진돗개 블랙탄 반려견이 낯선 이방인을 보고 짖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였다. 그중 두 마리는 사무실에 풀어 놓고 지낸다. 개를 좋아하는데도 비교적 덩치가 커 두려움이 느껴졌다. 경기 김포시 집에는 무려 15마리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가족보다 더 나를 반겨주고, 영리해서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어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반려견을 데리고 사무실에서 인근 학동공원까지 오전 오후 한 시간, 3㎞씩 약 8000보를 걷는데 이것만으로도 운동 겸 건강관리가 된다”고 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습관적으로 한다.

김포시 양촌면 양곡리에서 나고 자란 그는 소년 시절 왕복 10㎞ 이상을 걷고 달리며 통학했다. 지금처럼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많이 움직여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더불어 “하고 싶은 말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성격이 오히려 마음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안 좋은 일은 빨리 잊어버리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성격도 건강에 보탬이 된다”고 덧붙였다.

약간의 저혈압 증세와 치아 문제로 가끔 치과에 갈 뿐, 특별히 아픈 곳은 없다. 술과 담배도 즐겼으나 영화인 특성상 외국 출장이 잦은 관계로 장시간 비행으로 금연이 힘들어 아예 끊었다고 했다. 보통 밤 11시에 잠자리에 들어 오전 4시까지 수면을 취한다. 음식은 특별히 가리지 않으나 설렁탕을 좋아한다.

그는 “영화감독을 하려면 건강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1967년 20대에 시작한 골프는 약 50년간 즐겼으나 80대에 들면서 그만두었다. 고령에 하는 골프는 아무래도 무리라고 생각해서다. “영화 제작 중에도 날씨를 핑계로 제작을 중단하고 골프장으로 향했을 만큼 한때 영화보다 골프에 미쳤을 정도로 푹 빠져 살았다”고 했다. 그 결과 홀인원도 세 차례나 했고, 베스트 스코어는 이븐파로 프로급이었다고 자랑했다. 골프와 관련한 일화도 들려줬다. “영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인해 보안법 위반으로 도피생활 중에도 골프를 쳤는데, 자신을 체포하러 온 수사관과 즉석 라운딩을 하기도 했다”며 껄껄 웃었다.

절친한 친구인 고 최병렬 전 문화공보부 장관이 큰 수익이 날것이라면서 지역방송 참여를 권유했지만, 외골수 영화인의 자세를 버리고 싶지 않아 사양했다. “돈이란 있으면 쓰는 거고, 없으면 안 쓰면 되는 것”을 신조로 삼은 그는 후배 영화인들이 돈이 없어 제작을 못 하면 기꺼이 지원해주기도 했다.

특히 그는 “한국영화가 더욱 발전하려면 영화진흥공사, 영상자료원, 영상물등급위원회와 같은 정부조직은 없어져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1970년대에는 영화 발전을 위해 필요했지만, 세계가 한국 영화에 주목하고 있는 지금은 오히려 발전의 저해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영화인들이 좌·우 이념 갈등을 버리고 한마음으로 건강한 영화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 이사장은 시단에 등단해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초연’ ‘초우’ 등 그의 작품들은 흔한 통속성 애정물이 아니라 ‘영화의 시’(시네포엠)로 표현할 수 있는, 한국영화 뉴시네마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가 따른다. 그는 지난해 5월 하늘로 떠난 강수연 배우의 빈소 영정 앞에 국화꽃과 함께 추모시를 헌시하기도 했다.

건너려 해도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갔다 / 네가 내 곁에 있을 때 우리를 설렘 속에 가득하게 가두었다 / 네가 내 곁을 떠나가고 우리를 막막함 속으로 가두는구나 /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우리들의 기억들 /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아픔들 / 아픔의 강을 혼자서 건너간 55세의 여배우 / 잘 가라. 예쁘게 잘 가라.

정진우 한국영화복지재단 이사장이 지난해 12월 5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미완성으로 끝난 대작‘여명의 눈동자’를 다시 만들고 싶지만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뒤로 1980년 개봉해 대종상 9개 부문을 휩쓴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포스터가 걸려 있다.

■ 정진우 이사장이 걸어온 길

1937년 경기 김포군 양촌면 양곡리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부농이었으며 양곡국교를 설립해 교장을 맡기도 했다. 그가 8살이던 1945년 해방되던 해에 부친이 일제의 핍박으로 인해 별세한 후 가세가 기울었으나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 덕에 9남매 모두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연극과 영화계에 관심을 가졌다. 김포농고 재학 중 연극반에 들어가 유치진의 ‘원술랑’ 나운규의 ’아리랑’등에 주된 역할을 했다.

서라벌예전에 진학하려 했으나 아버지를 대신한 서울대 의대 출신의 큰형이 법대에 가라고 권유해 1956년 중앙대 법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시절에도 연극반 활동을 했다. 당시 영화배우 최무룡, 후에 명DJ가 된 이종환 등이 중앙대 연극반에서 함께 활동했던 멤버였다. 박상호 감독(연극배우 박정자의 오빠)밑에서 조감독을 거쳐 1962년 ‘외아들’로 최연소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196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영화 연출과 제작 외에도 수입, 배급 등으로도 크게 성공했으며, 1985년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에 3300석 규모 아시아 최초·최대의 복합영화 공간 시네하우스를 설립해 대표를 맡았다. 1967년 한국영화감독협회를 창립했고, 1973년 영화진흥공사 제작담당 상임이사, 1974년 영화제작자협회 부의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한국 영화가 동시녹음시대로 접어들게 한 개척자로 영화기술의 선진화에도 기여했다. 1984년 영화복지재단을 창립해 현재까지 영화인들의 복지를 위해 힘쓰고 있다. 1985년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2001년 대종상영화제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국민훈장, 청룡상 최우수 감독상, 대종상 감독상, 아시아영화제 최고 청년감독상, 1993년에 열린 칸영화제에서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13월의 사랑’‘파란 이별의 글씨’‘국경 아닌 국경선’과 2014년 회고록 ‘영원한 영화인 정진우’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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