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정부와 기업, 관치중독에 빠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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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해결사 역할 반복하면 시장은 문제해결능력 잃어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주인 없는 기업’ 발언으로 이슈가 된 소유 분산 기업의 지배구조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와 기업 역사가 오래된 미국·유럽에서는 오히려 상장 기업 중에서 ‘주인 있는 기업’을 찾기가 더 어렵다. 창업 후 여러 세대를 거치며 대주주는 사라지고 전문경영인이 경영을 맡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기자가 뉴욕 특파원이던 2014년 미국 전자상거래 업계 2위인 이베이의 전문경영인 존 도나호 회장(현 나이키 CEO)과 ‘행동주의 투자자(activist investor)’ 칼 아이컨의 대결이 화제였다. 아이컨은 이베이가 2002년 인수한 온라인 결제 서비스 업체 페이팔을 분할하라고 요구했다.
페이팔은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이베이와 경쟁 관계인 다른 전자상거래 업체들이 이베이를 배 불려주는 페이팔 이용을 꺼린다는 것이다. 이베이도 페이팔의 급성장에 안주하는 바람에 본업인 전자상거래에서 1위인 아마존과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도나호 회장은 아이컨에게 기업 사냥꾼이란 낙인을 찍고, “이베이의 장기 성장을 위해선 페이팔과의 시너지가 중요하다”고 맞섰다. 하지만 소액 주주들의 생각은 달랐다. “페이팔이 이베이와 남남이 되면 더 많은 전자상거래 업체들을 고객으로 유치해 회사를 키울 수 있다”는 아이컨의 주장에 동의한 것이다.
결국 9개월간의 분쟁 끝에 도나호 회장은 백기를 들고 2선 퇴진했고, 페이팔은 이베이에서 분리됐다. 분할 상장 첫날 이베이 시가총액은 347억달러였고, 페이팔은 500억달러였다. 새우(이베이)가 고래(페이팔)를 품고 있었던 셈이었다. 지금은 페이팔 시총이 949억달러로 이베이(272억달러)의 3.5배가 됐다.
소유 분산 기업에서는 전문경영인이 잘못해도 주주들이 견제하기 어렵다. 경영에 대해 잘 모를뿐더러 응집력도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나서는 게 행동주의 투자자다. 이들은 일정 지분을 취득해 주주 자격을 얻은 뒤 이사진이나 CEO 교체, 기업 분할이나 합병 등을 요구한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소액 주주들을 결집해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로 승부한다.
행동주의는 과거 경제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자금난에 빠진 기업을 헐값에 인수해 비싼 값에 파는 수법으로 벌처(Vulture·대머리 독수리) 펀드라는 악명을 얻었다. 하지만 경제 위기가 잦아든 뒤에는 기업 사냥보다 기업 실적 개선을 요구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홀대받던 소액 주주를 대신해 경영진을 견제한다는 점에서 영국 이코노미스트지(誌)는 “행동주의 투자자는 상장 기업에 ‘뜻밖의 구원자(unlikely saviour)’”라고 평했다.
행동주의가 CEO를 견제하는 선진국들과 달리 국내에선 정부가 이 역할을 맡아왔다. 작년 말과 올해 초 신한금융과 우리금융 회장이 연임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금융 당국이 상당한 역할을 했고, 다음 달 있을 KT 회장 선출 주주총회에서는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지기로 했다.
정부 개입은 단기적으로 효과가 확실하다는 장점만큼이나 오랜 후유증을 남긴다. 무엇보다 시장이 관치(官治)에 중독돼 문제를 자체 해결할 능력을 잃는다. 초등생 자녀의 숙제를 부모가 대신해 주면 당장 학교에서 혼나지는 않겠지만, 중장기적으로 자녀의 실력이 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고(故) 게리 베커 시카고대 교수는 “정부 개입은 시장의 실패가 정부 대책으로 극복되고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만든다”고 했다. 정부 대책은 미봉책일 뿐이고 근본적으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시장의 자정 능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가 깊이 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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