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학생인권조례 폐지 안 된다

오창민 기자 2023. 2. 9.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시행 11년 만에 폐지 위기에 처했다. 보수 성향의 종교단체와 학부모단체 회원들이 낸 조례 폐지 청구가 상임위 심의를 거쳐 서울시의회 본회의에서 가결되면 이달 중으로도 학생인권조례는 폐지될 수 있다. 현재 서울시의회는 학생인권조례에 비판적인 국민의힘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오창민 논설위원

학생인권조례는 2011년 경기, 2012년 서울이 도입한 이후 현재 광주·전북·충남·제주·인천에서 시행하고 있다. 학생인권을 보장해 학생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이루게 하자는 취지다. 헌법·법률·명령보다 하위 규범이지만 학생들의 학교생활과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학생인권조례의 근거는 헌법과 교육기본법,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이다. 학생인권조례는 두발과 복장 규제, 체벌, 일괄적 소지품 검사를 금지하고 성별과 종교,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학생을 차별할 수 없도록 하면서 학생들 인권 신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론자들의 주장은 조례가 학생들의 동성애와 성 문란을 조장하고, 학생의 권리만 보장해 교권 붕괴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폐지론자들이 문제 삼는 대표 조항은 서울학생인권조례 제5조(차별받지 않을 권리)다. 해당 조항은 “학생은 성별, 종교,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국가, 출신민족, 언어, 장애, 용모 등 신체조건,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또는 가족상황, 인종, 경제적 지위,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병력, 징계, 성적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폐지론자들은 10년 전에도 이 조항으로 인해 학교가 동성애 천국이 될 것이라고 했다. 또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 창궐하며, 임신·출산하는 여학생들로 인해 학교는 산부인과로 전락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 사회적 약자와 성소수자 등을 혐오할 자유를 달라는 것에 불과하다. 학교는 국민 세금으로 미래세대를 가르치는 신성한 곳이다.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학생이라면 학교는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보듬어야 한다. 성적 취향이 다르거나 임신한 학생이라고 해서 배움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용납될 수 없다.

학생인권조례는 교권 붕괴와도 관련이 없다. 지난해 여름 충남의 한 중학교에서 남학생이 수업 중 교단에 드러누워 여교사를 촬영하는 영상이 온라인에 유통됐다. 영상 속 교사는 이 같은 상황에서도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론자들은 이 영상을 유포하며 조례 때문에 교권이 이 지경이 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군대조차 금지한 체벌을 학교에서 부활하고, 학생은 교사의 통제하에 둬야 한다.

학생인권조례가 상위 법령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결론이 났다. 서울시교육청이 2012년 1월 학생인권조례를 공포하자 이주호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현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학생 지도에서 학교별 재량권을 부여한 초·중등교육법에 위배된다”며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 각각 무효확인 소송과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그러나 대법원과 헌재 모두 서울시교육청의 손을 들어줬다. 일각에서는 학생인권조례가 인권보장을 명목으로 각종 옥상옥 제도를 만들어 행정 낭비를 야기하고 불필요한 행사를 벌이게 한다는 주장도 펴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다.

폐지론자들이 대안으로 제시한 ‘학교구성원 성·생명윤리 규범 조례안’(성윤리조례안)을 보면 학생인권조례의 당위성만 부각된다. 성윤리조례안에 따르면 결혼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정신적·육체적 연합을 의미한다. 성관계는 혼인관계에서만 해야 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에 배치될 뿐 아니라 시대착오적이다. 성윤리조례안은 성소수자를 혐오 대상으로 간주하고 사실상 위헌 판결이 난 ‘낙태죄’도 왜곡하고 있다.

학생들의 인권 수준이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지만 갈 길은 멀다. 많은 학생이 성적과 진로로 불안을 느끼고 있다. 학교에서는 체벌과 언어폭력, 두발·복장 규제, 성적을 이유로 한 차별과 모욕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학생은 어린 시절부터 인격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래야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자신의 인권도 지키는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다. 지금은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운운할 때가 아니다. 지역 간 학생인권 격차 해소를 위해 국회 차원에서 학생인권법을 제정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확대돼야 한다.

오창민 논설위원 riski@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