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아영의 레인보] 여성들의 피해는 왜 늘 뒷전으로 둘까

임아영 기자 2023. 2. 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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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14일 서울 신당역에서 순찰을 돌던 여성 역무원이 사망한 다음날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신당역을 찾아 “국가가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했다.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터’에서 여성이 일하다 죽은 끔찍한 사건, 여성들의 분노가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때처럼 커질까 두려웠을까. 그로부터 한 달 뒤 한 장관은 브리핑을 열어 스토킹 범죄에 적용되던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폐지하고, 온라인상 스토킹 범죄도 처벌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스토킹처벌법 개정안을 ‘직접’ 발표했다. 당시 법무부는 “11월 국회 제출 후 연내 국회 통과 추진 예정”이라는 일정표도 제시했다.

임아영 소통·젠더 데스크

장관이 직접 브리핑을 열 만큼 사안을 챙기고 있다는 인상을 줄 법도 하지만 이전에 법무부가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보는 게 순서다. ‘반의사불벌죄’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형사처벌을 할 수 없는 범죄다. 여성에 대한 폭력 범죄에는 유난히 반의사불벌죄 조항이 끼어 있다. 스토킹 범죄뿐 아니라 가정폭력도 반의사불벌죄다. 강간죄와 강제추행죄도 반의사불벌죄였지만 가해자가 합의해달라고 피해자를 압박하는 문제가 반복되자 2013년에야 폐지됐다.

전주환도 스토킹 범행에 대한 합의를 요청하기 위해 피해자의 주거지를 찾아갔다. 이처럼 반의사불벌죄 때문에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압박해 처벌의 수위를 낮추려 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지만, 이 조항이 필요하다는 쪽에선 되레 피해자의 ‘선택권’을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신당역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 스토킹처벌법을 논의할 당시 법무부는 반의사불벌죄를 고집했다. ‘선택권’을 주장하고 싶었을까. 신당역에서 사람이 죽고 나서야 법무부는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폐지하겠다고 했다. 법무부 발표 이후 많은 언론들이 ‘반의사불벌죄 폐지’를 제목으로 선택했지만 ‘이제서야 반의사불벌죄 폐지하는 법무부’라고 적어야 적확한 표현이다.

‘실세 장관’이 있어서인지 요즘 법무부는 무소불위의 모습이다. ‘젠더 갈등’을 핑계로 중요 여성 이슈를 뭉갤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비동의 강간죄 9시간 만에 철회 논란’은 그 정점이었다. 여성가족부는 형법상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폭행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법무부가 ‘신중 검토’ 의견을 제시했다고 맞받아치자 9시간 만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워담기 바빴다. 양성평등위원회가 심의·의결한 ‘제3차 양성평등기본계획’에 적시까지 한 내용이었지만 “윤석열 정부에서 새로 검토되거나 추진되는 계획이 아니다”라는 희한한 결론으로 끝났다.

부처 간 이견 문제도, 부처 간 힘이 밀리는 문제도 아니다. 부처 간 머리를 맞대 논의하고 양성평등위원회 심의까지 거친 정책을 담당 부처들은 부정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여성 이슈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풍경이다. 이런 풍경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힘을 잃고 흩어진다. 강간죄를 인정받기 위해 ‘죽을 만큼 저항했는지’를 입증해야 했던 수많은 사건들을 잊었는가. 여성에 대한 폭력은 ‘저항했는지’ 여부로만 판단하고 싶다는 주장에 어디까지 대응해야 하는가. ‘비동의 강간죄’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권고한 바 있는 사안으로, 국제형사재판소와 유럽인권재판소는 동의 여부에 따라 강간을 판단하고 있다는 얘기는 현재 상황에서 사치스러울 정도다.

스토킹처벌법 개정은 어떻게 됐을까. 지난해 11월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했던 정부 발의안은 아직도 국회에 올라오지 않았다. 왜일까. 여성들의 피해는 늘 뒷전으로 두기 때문이다. 1월에도 스토킹 신고에 앙심을 품고 옛 연인을 흉기로 찌른 50대 남성이 구속됐다. 피해자는 흉기로 여러 곳을 찔려 중상을 입었다. 팔짱을 끼고 법의 합리성을 따지는 남성들이 흘려보내는 시간 속에서 여성들은 죽을 위험에 처하고 또 죽기도 한다.

젠더 기반 폭력에 대응하는 법·제도 전반을 개선하기 위해 지난해 출범한 법무부 자문기구는 1년 동안 단 한 개의 안건만 논의한 채 활동을 끝냈다. 그러면서 법무부는 유엔 회원국들이 ‘4차 국가별 정례인권검토’에서 인신매매방지법을 거론하며 2017년 대비 인권이 더 신장됐다는 긍정 평가를 했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회원국들이 피해자 보호 조치와 가해자 처벌 조항을 보완해야 한다는 권고를 내놓은 것은 알리지 않았다. ‘잘한 것도 있다’고 홍보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일관적이어야 한다. 여성들의 피해는 늘 뒷전으로 두면서 젠더 이슈를 액세서리처럼 쓰지 말라.

임아영 소통·젠더 데스크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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