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쌀값 안정이 정쟁의 대상인가

기자 2023. 2. 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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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당은 자동시장격리가 의무화하면 오히려 농가소득이 줄 것이라며 양곡관리법 개정을 반대하고 있다. 공급과잉에도 안정적으로 수매가격을 보장하면 농민들이 쌀 생산량을 늘려, 궁극적으로 쌀값이 하락세를 보일 것이란 얘기다.

최재관 전 청와대 농어업비서관

문재인 정부는 2020년 공익직불제를 도입하면서 목표가격 아래로 쌀값이 떨어지면 소득을 보전해주는 변동직불제를 폐지했다. 대신에 전년보다 쌀값이 3% 넘게 내리거나 쌀 생산량이 5% 이상 늘면, 일부 쌀을 시장에서 격리시켜 수급 조절을 꾀할 수 있도록 법제화했다. 이른바 자동시장격리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쌀값과 생산량이 기준치를 넘어설 때 반드시 시장격리를 해야 한다고 법을 고치면 농민들이 맘 놓고 생산량을 늘려서 더 큰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해서라도 막겠다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과연 그럴까? 2021년 10월8일 정부는 양곡수급위원회를 열고 수급안정대책을 발표했다. 그런데 당시 통계청의 쌀 예상 생산량이 전년보다 5% 이상 늘어 발동 요건을 갖췄지만, 정부는 그해 11월15일 통계청 발표를 한 번 더 지켜보고 쌀 시장격리를 결정해야 한다면서 시간을 끌었다. 이후 자동시장격리를 요청하는 농민단체들의 성명과 항의 방문이 잇따랐다. 국정감사에서 여야 국회의원들도 한목소리로 쌀 시장격리를 주문했다. 그러나 정부는 계속 시장격리를 미뤘다. 쌀값이 폭락세로 전환된 그해 12월28일에서야 비로소 시장격리를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법 개정과 함께, 시행령과 시행규칙까지 마련됐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정부는 2000년 소값 폭락 안전장치로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적정 송아지 판매가격을 보장해주는 송아지생산안정제를 시행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비현실적인 암소 마릿수 기준으로 인해 지난 20년간 단 한 차례도 발동하지 않았다. 이런 선례가 있기에 야당은 농민단체들의 의견을 좇아 법을 고쳐서라도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석열 정부는 쌀 일변도가 아니라 밀과 콩 같은 전략작물을 심어서 식량주권을 달성해야 한다며 전략작물직불제를 추진하고 있다. 논에 쌀이 아닌 콩을 심도록, 소득을 보전해주는 쌀생산조정제를 통해 쌀 공급과잉을 차단하고 식량작물 다양화를 꾀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 때 급락한 쌀값 회복을 위해 3년간 한시적으로 성과를 검증한 논 타작물재배지원사업(쌀시장조정제)과 유사하다. 정부·여당이 폭락한 쌀값을 정상화하는 데 확실한 정책 성과를 나타낸 쌀생산조정제를 차용한 셈이다. 이럼에도 공급과잉에 따른 정부 지출 부담과 농민소득 감소 우려를 운운하며 이미 법제화한 제도의 시행을 더욱 공고히 해달라는 농민의 바람을 외면하는 것은 좀처럼 납득하기 힘들다.

요즘 농촌의 겨울나기는 유례없이 힘겨워 보인다. 지난해 비료, 사료 등 농자재 가격이 두 배가량 치솟았다. 최근에는 유례없는 농사용 전기요금과 면세유 가격 폭등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폭락한 쌀값과 소 가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정부의 무리한 할당관세 인하 조치는 한우는 물론 양돈, 양계, 낙농뿐만 아니라 양파, 마늘, 과일 등 우리 농촌의 주력 농축산물 공급과잉을 부추겼다는 원성을 사고 있다.

이미 정부가 약속한 자동시장격리제를 무용지물로 만든 법 조문을 바로잡고자 하는 농민의 바람을 정쟁으로 덮으려 해선 안 된다. 우리 헌법 123조 4항은 ‘국가는 농수산물의 수급균형과 유통구조의 개선에 노력하여 가격안정을 도모함으로써 농어민의 이익을 보호한다’고 정하고 있다. 법에서 가격안정을 위해 ‘할 수 있다’고 정한 것을 ‘안 해도 된다’며 농민들과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 정부·여당이 할 짓인지 묻고 싶다.

최재관 전 청와대 농어업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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