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아! 튀르키예, 아! 가지안테프

2023. 2. 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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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동남부 가지안테프주와 인근 지역의 대지진으로 튀르키예 국민들이 울고 있다. 내가 가지안테프 지역을 방문한 것은 대사 재임 시인 2015년 6월, 시리아 전쟁으로 튀르키예에 밀려 들어오는 난민촌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시리아 국경과 불과 120여 ㎞ 떨어져 있는 200만여 명 인구의 가지안테프시에는 시리아 난민이 30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날이 갈수록 불거지고 있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시리아 사람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는 없으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보살펴야 한다는 따뜻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난민촌의 시설과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튀르키예 군수는 너무나 많은 난민들로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막막해 난민 업무를 멈추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가도 자라나는 시리아 어린이들의 눈망울을 보게 되면 다시금 도와야 하겠다는 뜨거운 마음이 일어난다고 했다. 결코 쉽지 않은 환경에서 더 어려운 시리아인들을 돌보고자 하는 튀르키예 사람들을 본 이후 그리고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조그마한 도움을 요청하는 군수의 부탁을 받고서 외교부에 난민학교 건축을 건의하여 4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난민학교 4곳을 지어 기증하였다.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 시내 중심지에는 한국전에서 전사한 참전용사를 기리는 석가탑 모양의 건축물이 있다. 그 주위를 둘러싼 벽면에는 용사들의 이름, 생년월일, 전사한 날이 새겨져 있는데 1950년 11월 28일과 11월 29일에 전사한 19세 및 20세의 젊은이들이 유난히 많다. 이번에 지진의 영향을 받았던 하타이주 이스켄데룬에서 출발하여 장기간 항해하였던 튀르키예 젊은 병사들은 중공군을 막기 위하여 바로 평안남도 군우리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한국전 당시 미국·영국·캐나다에 이어 1만5000여 명의 많은 병사를 파병하였으며 그중 724명이 전사하고 2000여 명이 부상하거나 실종되었다. 튀르키예 젊은이들은 중공군의 남하를 늦추어 궁극적으로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아냈다.

튀르키예에는 유독 난민이 많다. 제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을 받아들여 아인슈타인이 감사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 유고슬라비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시리아 내전 등 중동·유럽·서남아시아의 분쟁이 있을 때마다 고향을 떠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튀르키예로 떠나온 이방인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 왔다.

튀르키예 국민들은 유독 우리에 대한 애정은 깊은데 이는 단지 한국전을 통하여 어려움을 나눈 형제라는 생각 이외에도 6~7세기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면서 인종적으로 교류가 있어 왔던 점과 돌잡이·공기놀이·언어 등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8000여 ㎞나 떨어져 있음에도 젊은이들을 파병하여 어려움에 처한 우리를 도왔던 튀르키예 국민들은 한국이 전쟁의 참화를 겪은 이후 60여 년 만에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된 것을 부러워하고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또한 한국을 배우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번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튀르키예 남부의 여러 주를 대사 재임 시 방문하였을 때 곳곳마다 시리아 난민들이 넘쳐났음에도 그들을 돌보던 튀르키예 국민들의 따뜻한 눈망울이 눈에 선하다. 자신들의 삶이 결코 녹록지 않음에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왔던 튀르키예가 지금 울고 있다. 이제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할 때이다.

[조윤수 전 주튀르키예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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