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업 대작 4점, 러시아 박물관서 발견…고종의 선물이었다

노형석 2023. 2. 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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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러시아황제 대관식 선물로 그려
크렘린박물관, 특별전서 실물 첫 공개
러시아 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된 장승업의 말년 대작 <취태백도>의 세부. 시인 이태백이 술에 혼곤하게 취한 자태를 묘사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영화 <취화선>(2002)에서 광기 어린 예술혼을 불태우는 주인공으로 나왔던 조선 말기 최고의 실력파 화가 오원 장승업(1843~1897). 그가 그린 숨은 대작이 러시아 모스크바 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됐다. 오원이 숨지기 한해 전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 용도로 그려 바친 작품이 현지에 전해져 남아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1896년 조선 고종 임금(재위 1863~1907)이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맞아 민영환(1861~1905)을 전권공사로 삼은 축하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가져간 오원의 대작 그림들과 나전가구, 향로 등 선물 일부가 127년 만에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 특별전시회를 통해 10일부터 공개될 예정이라고 8일 발표했다. 재단은 앞서 현지 박물관에 소장된 고종의 선물 컬렉션을 살펴본 결과 지금껏 학계에 보고된 적 없는 장승업의 실물 그림 4점을 확인했으며, 이들 가운데 ‘고사인물도’ 2점이 ‘한국과 무기고, 마지막 황제 대관식 선물의 역사’란 제목의 특별전(4월19일까지)에 출품된다고 밝혔다.

장승업의 말년 대작 <노자출관도>의 세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재단에 따르면, 1896년 고종이 민영환 사절단을 통해 전달한 선물은 총 17점으로 확인된다. 이들 가운데 특별전 출품작은 장승업 그림 2점 외에 흑칠나전이층농 1점, 백동향로 2점으로 모두 크렘린박물관 소장품이다. 나머지 선물들은 햇빛을 가리는 발(簾)과 등매석(登每席) 등으로 현재 모스크바 국립동양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당시 전달한 선물들은 수행원으로 함께 대관식에 갔던 정객 윤치호(1866~1945)의 일기를 통해 일부 언급됐으나 구체적인 실물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러시아 황제에게 선물한 장승업 그림들엔 <노자출관도> <취태백도> <왕희지관아도> <고사세동도>란 제목이 각각 붙어있는데, 특별전시에는 <노자출관도> <취태백도>만 선보이게 된다. 사상가 노자가 숨어 살기 위해 소를 타고 주나라 관문을 떠나는 장면과 대시인 이태백이 술에 거나하게 취한 모습, 명필 왕희지가 거위를 바라보며 영감을 얻고 정결한 선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동자가 오동나무를 닦는 광경 등이 그려졌다. 이른바 고사인물화로 불리우는 것들로 신화나 역사 속 인물에 연유된 일화를 그림으로 풀어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네 작품 모두 높이(세로 길이)가 어른 키 정도인 174.3㎝에 달해 오원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보기 드문 대작들이다. 각 작품마다 아래쪽에 나라 이름인 ‘조선’(朝鮮)을 먼저 쓰고 ‘오원 장승업’이란 한자 서명(낙관)을 뒤이어 쓴 것이 눈에 띈다. 재단 쪽은 “이런 서명 방식은 장승업 작품 중 처음 확인된 것으로, 외교적 선물을 염두에 두고 그려졌음을 보여준다”고 풀이했다.

장승업 작 <노자출관도>의 전체 모습. 세로 길이가 어른 키만한 174㎝에 달한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장승업 그림과 더불어 눈길을 끄는 출품작은 목가구 흑칠나전이층농이다. 조개껍데기(나전) 조각들로 문양을 만들어 옻칠로 붙이며 장식한 19세기 나전칠기 공예의 최고급 명품으로 평가된다. 아래 부분에 나전 무늬로 해, 달, 학, 거북 등 십장생(十長生)을 표현해 러시아 황제의 무병장수를 바라는 의미를 담았다. 공예사 전문가들은 이 작품이 국내 근대 나전공예사에서 이른바 ‘끊음질’ 기법이 선구적으로 도입된 사례를 보여준다는 점을 주목한다. 기존에는 1920년대 일본에서 ‘실톱’이 도입되면서 ‘끊음질’ 기법이 유행한 것으로 생각해왔으나, 그보다 30여년 앞서는 이 작품에 관련 기법이 이미 능숙하게 적용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공예사적으로도 획을 긋는 유물임이 드러났다.

특별전에 전시될 고종의 선물 중 일부인 흑칠나전이층농.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특별전에 고종의 선물 중 일부로 선보일 사각진 모양의 백동향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지난 2010년 사진이 국내에 공개됐던 백동향로 2점도 뛰어난 명품이다. 각각의 평면이 사각과 원형으로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한다. 사각 향로 몸체에는 ‘향연’(香煙: 향기로운 연기가 서리다)을, 둥근 향로 몸체엔 ‘진수영보’(眞壽永寶: 참다움과 장수, 영원한 보물)란 글자를 각각 새겨놓았다. 길상 문자를 중심으로 직선과 곡선이 얽혀들면서 뚫음무늬를 새긴 뚜껑 부분의 정교한 장식미가 일품이다. 재단 쪽은 “지난 2020~21년 흑칠나전이층농의 현지 보존처리 작업 예산을 지원하고 특별전시를 돕는 과정에서 지금껏 세상에 알려진 바 없던 1896년 ‘외교 선물’의 실체를 박물관과 함께 공개할 수 있게 됐다”며 “나라 밖으로 나간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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