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소’는 일본 군사시설 ···일본군 ‘외출’은 성노예 시스템으로 이어져

김종목 기자 2023. 2. 8.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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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야전중포병 5여단 휘하 15연대 제2중대 오장 나가이 히토소는 수첩에 난징 공방전 등 초기 상황을 기록했다. 위안소에 관한 기록은 1938년 1월18일자에 나온다. “외출의 목적은 위안소에 있다. 지난번 개업식에는 제비를 뽑았는데도 끝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가지 않았다. 이후 세 번째 기회를 맞아 중대장 등 간부들에 떼밀려나갔다. 오늘은 조선이다. 처음 마음먹은 대로 (나는)들어가지 않았다.”

같은 해 3월3일 2대대 진중일지는 외출증 소지, 위안소 할당일 외에 위안소에서의 음주 금지, 성병에 대한 경각심 등을 전한다. 2중대 중대회보에는 “1. 하사관, 병의 입구는 남측 동문으로 한다 2. 단가 지나인 1엔 조선인 1엔 50센 일본인 2엔 3. 돈은 반드시 지불할 것” 등을 적었다. 3월10일자 대대회보엔 “타 부대의 위안일에는 절대 위안소에 출입하지 않”도록 한 기록도 나온다.

하종문(한신대 일본학과 교수)은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휴머니스트)에서 위안소 이용과 직결되는 외출 체계에 관한 기록 등을 두고 “위안소의 이용과 관리는 처음부터 부대 운용이라는 틀 속에서 계획되고 실행되었으며 병사들은 외출을 통해 부대에서 허가를 받은 공식적인 ‘위안’을 얻기 위해 위안소를 출입했다”고 말한다. “ ‘외출’은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장교를 포함한 병사와 위안소, ‘위안부’를 연결해주는, 바꾸어 말하면 일본군 성노예 시스템을 발생시키는 공식적, 제도적 행위였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위안소는 “일본군의 조직 체계와 작전에 깊숙이 결부된 군사시설”, 즉 “평시에 출입하던 민간의 성매매업소와는 질적으로 구별해야 할, 해당 부대에 부속된 ‘군 시설’ ”이자 “전쟁 수행을 위해 기획된 일본군의 제도이자 시스템”이었다.

중국 칭다오의 보병 제41연대의 위안소 지도(왼쪽)와 필리핀 마닐라방위사령부 관할 내 위안소 지도(1943년 1월15일). 칭다오 지도는 붉은 원 빗금친 부분이 위안소다. 마닐라 지도에서 아래 표 ‘慰安所(위안소)’가 표기됐다. 지도명은 ‘병참제시설요도’다. 하종문은 “용어가 단적으로 말해주듯이 위안소는 여관, 식당과 함께 일본군에게 필수적인 병참시설의 하나로 자리매김되어 있다”고 했다. 휴머니스트 제공

하종문은 일본군의 진중일지에 기록된 위안소 실태를 부각한다. 진중일지는 “중대(독립된 소대 포함) 이상의 부대가 동원령을 수령한 날부터 복원을 완료한 날까지 작성이 의무화된 공식 기록물”이다. 하종문은 위안소나 위안부가 기재된 진중일지 ‘전체’를 해당 부대 관련 자료와 접목해 분석한다. 위안소의 설치와 이용을 부대의 이동, 주둔, 작전, 훈련 등 통상적인 족적과 분리할 수 없는 군 행동의 ‘일부’라는 걸 드러낸다.

진중일지와 관련 자료엔 중국 각지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폭력에 관한 기록도 자주 나온다. 114사단 예하 치중병 제114연대 소속 제1중대의 1937년 12월 진중일지는 “연대장이 강간 사건이 다수에 이르렀다며 주의를 환기했다”고 적었다. 1940년 친저우와 난닝을 관장하는 헌병대 보고서는 위안소 부근에서 권총을 쏘거나 ‘종업부’에게 군도로 상해를 가하고, 위안소에서 폭행을 저지른 사례를 적시했다. 1940년 11월 대본영 육군부 연구반의 보고서는 “요리점, 음식점, 그 밖의 위안시설 등이 점차 증가하게 되어 주색으로 촉발된 군기범 및 유흥비가 궁해져서 약탈, 강도, 절도, 도박 등의 파렴치범이 증가”했다고 적었다.

하종문은 이 같은 범죄 행위를 두고 “위안소라는 해법은 전시 성폭력 문제의 경감에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명백한 오류였다는 자기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일본은 위안소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종문은 1938년 1월15일자 육군성 경리국 건축과 문서에서 1937년 12월 상하이파견군 참모장 이누마 마모루가 요청한 콘돔 100만개를 항공편으로 상하이 파견군에 전달한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하종문은 성병의 심각화를 인지한 군의관 쪽의 판단과 견해가 중일전쟁 때 위안소 제도 창안으로 이어졌다고도 했다.

하종문은 2000년 12월 도쿄에서 개최된 시민법정 ‘일본군성노예전범국제법정’ 한국 측 준비단 일원이다. 1998년부터 준비단에 참가해 위안부에 대한 ‘가해’를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가시화하는 일에 함께했다.

하종문은 “진중일지를 매개로 함으로써 ‘점’에 지나지 않던 위안소 관련 자료는 ‘선’과 ‘면’을 채워나가며 전시 성폭력의 퍼즐을 풀어내고 전시 성노예라는 본질을 증명하는 열쇠일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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