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 동안 후퇴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화해 이제 전설이 된 아이리스 아펠.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패션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들지만 100년쯤 살다 보면 보통 사람은 알기 힘든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현역 최고령 모델이자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아이리스 아펠(102)이 터득한 진리는 이런 것이다. '많을수록 좋고 적은 것은 지루하다(more is more & less is a bore).’
그녀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광고나 잡지에서 한 번쯤 커다란 뿔테 안경에 빨강·초록 원색의 의상, 목과 팔에는 특대형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감고 빨간색 립스틱을 바른 백발의 할머니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화려하고 에너지 넘치는 스타일링으로 보는 이들까지 유쾌하게 만드는 102세 패션 아이콘, 그녀가 바로 아이리스 아펠이다.
패션계에는 블랙이 모든 색의 기본이고, 미니멀리즘이 스타일링의 출발선이라는 오랜 고정관념이 있다. 블랙과 미니멀리즘이 세련된 조합이기는 하나, 문제는 너도나도 이를 고집하다 보니 개성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반면 알록달록 화려한 의상은 촌스럽다는 편견 아래 일상에서 거의 금기시되고 있다. 아이리스 아펠은 이런 편견과 고정관념의 대척점에 있는, 독창성의 교과서 같은 존재다.
아이리스 아펠은 1921년 미국 뉴욕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인 아버지는 유리와 거울 사업을 했고, 러시아 출신 어머니는 고급 옷 가게를 운영했다. 패션을 가까이하며 미적 감각을 키우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던 셈. 뉴욕대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그녀는 1948년 칼 아펠과 결혼 후 '올드 월드 위버스(Old World Weavers)’라는 섬유 회사를 운영하며 디자인에 눈을 떴다. 올드 월드 위버스는 중세 유럽 스타일에서 영감받은 화려한 색감과 문양의 원단을 생산해 큰 성공을 거뒀고, 이를 기반으로 부부는 인테리어 분야에도 도전해 실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트루먼, 케네디, 아이젠하워, 존슨, 닉슨, 카터, 포드, 레이건, 클린턴 등 대통령 9인의 백악관 인테리어를 맡아 '패브릭의 영부인(First Lady of Fabric)’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녀가 구사하는 맥시멀리즘은 다양한 소재와 색상, 패턴, 질감, 커팅이 재치 있게 섞였으면서도 복잡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데, 이는 원단과 디자인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덕분이다.
칼과 아이리스 아펠은 2015년 남편 칼이 101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67년 동안 해로한 의좋은 부부였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이들은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디자인과 인테리어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여행 중 유럽의 벼룩시장에서 사들인 유행이 한참 지난 럭셔리 브랜드의 오트쿠튀르 의상, 에스닉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액세서리 등은 그녀의 스타일을 더 독특하고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됐다.
나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맥시멀리스트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오늘 뭐 입지?’를 고민해온 덕분에 그녀는 80세 이후부터 패션 셀럽으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2005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코스튬 인스티튜트는 아이리스 아펠의 패션 소장품을 선보이는 전시 'Rara Avis: Selections from the Iris Apfel Collection’을 열었다. 생존 인물의 패션 소장품을 선보이는 전시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역사상 처음이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2018년에는 아이리스 아펠의 모습을 본뜬 바비 인형도 출시됐다. 올빼미 안경과 구찌 슈트, 볼드한 목걸이와 뱅글을 한 그녀 인형은 8등신 바비 인형들 틈에서 독보적인 오라를 풍긴다.
아이리스 아펠은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2019년 모델 에이전시 IMG와 계약하고 여전히 모델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0년에는 각자의 옷장 속에 있는 화려한 패션 아이템들을 믹스 매치해 SNS에 올리는 '#irisyourcloset challenge’라는 이벤트를 열어 2만 명 이상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2022년 3월에는 글로벌 SPA 브랜드 H&M과 컬래버레이션 라인을 선보였는데, 최근 공개된 '에밀리, 파리에 가다’ 시즌3의 여주인공 릴리 콜린스가 해당 컬렉션 의상을 입고 파리를 누비는 모습이 넷플릭스를 통해 전파를 타면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오렌지 컬러의 상큼발랄한 튜닉, 레이스로 한껏 볼륨을 살린 퍼플 컬러 원피스 등은 파리의 클래식한 건물들과 멋진 조화를 이루며 드라마에 입체감을 더한다. 최근에는 영국의 뷰티 브랜드 시아떼런던과 협업해 립스틱, 아이섀도, 네일, 손거울, 파우치백 등으로 구성된 메이크업 키트를 내놓기도 했다.
아이리스 아펠이 스타일링에 있어서 강조하는 것은 독창성이다. 트렌드를 좇지 말고, 남과 같아 보이려 하지 말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녀의 맥시멀리즘이 누군가에게는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겠으나 아펠은 "나는 남을 웃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즐겁기 위해 옷을 입는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게 진실하다면 그게 답"이라고 말한다.
새해 달력을 움켜쥐고 '나이 먹어 볼품없어지니 입을 옷도 없다’고 한탄하기보다 아이리스 아펠처럼 자신만의 스타일을 당당하게 개척해보는 것은 어떨까. 멋진 아웃핏은 물론 젊은 세대에게는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쿨한 어른’, 동년배에게는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덤까지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