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더 글로리’ 속 ‘이판사판’은 한국 불교에만 있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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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커서 만나니까 이판사판이다 이거야?” “큰일 나, 사라야. 이판사판은 원래 불교용어야.”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중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동은(송혜교)이 성인이 된 후 복수에 나서면서 가해자 중 한 명인 사라(김히어라)를 찾아가 나눈 대화에서 나오지요.
저는 이 부분을 흥미롭게 봤습니다. 작가는 ‘이판사판’이란 단어를 이용해 사라의 이중성을 교묘하게 드러내지요. 드라마에서 사라는 목사의 딸로 나옵니다. 학폭 가해자인 사실을 감추고 경건한 척 살아가지요. 실제로는 마약중독자이기도 합니다. 교회로 찾아간 동은은 흥분하지 않고 한 걸음씩 사라를 압박합니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사라는 스스로 가면을 한꺼풀씩 벗지요.
동은은 먼저 “넌 진짜 신이 있다고 생각해?”라고 미끼를 던집니다. 사라는 “너, 방금 그 말, 신성모독이야”라며 미끼를 덥석 물지요. 이어서 동은이 사라를 계속 압박하자 튀어나오는 대사가 바로 ‘이판사판’입니다. 동은이 “이판사판은 원래 불교용어야”라고 받아친 것은 사라의 정체성을 정조준한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계에서 다른 종교, 특히 불교는 금기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의 딸이, 원래 뜻도 모르고 불교에서 비롯된 단어를 쓴다는 것 자체가 사라가 얼마나 허위와 가식으로 뒤덮힌 인물인지 드러내 보여준 것이죠. 이어 “너 약 처먹었어?”라고 절규하는 사라에게 동은은 “약은 니(네)가 먹던데? 다양하게”라고 결정타를 날리지요.
#이판사판(理判事判)은 한국 불교 용어
이미 알고 계시는 분이 많겠지만 ‘이판사판’은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 맞습니다. 그것도 중국 불교, 일본 불교에는 없고 한국 불교에만 있는 용어입니다. 불교사에 정통한 전문가에게 여쭤보니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1918)’에 처음 등장하는 단어랍니다. 저도 이번에 알게 됐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엔 ‘이판사판’을 ‘막다른 데에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이라고 뜻풀이하고 있지요. 일상생활에서는 ‘이판사판’을 ‘사생결단’ ‘죽기살기’ 비슷한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지요. 흔히 사판의 ‘사’를 ‘죽을 사(死)’로 생각하기 쉬운데 한자로는 ‘理判事判’입니다. ‘이판’은 수행하는 스님, ‘사판’은 행정을 담당하는 스님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입니다. 사찰 내 ‘역할분담’인 셈이지요. 그 배경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이어진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역사가 있습니다.
불교 탄압의 역사는 중국에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이란 말이 있습니다. 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 당의 무종 그리고 후주의 세종 등 세 명의 무(武), 한 명의 종(宗)에 의한 불교 탄압입니다. 그러나 그 탄압은 짧게는 몇 년, 길어도 수십년이었습니다. 조선왕조처럼 500년씩 이어지지는 않았지요. ‘득도’라는 용어를 들어보신 적 있을 겁니다. 흔히 ‘도(깨달음)를 얻었다’는 ‘득도(得道)’로 생각하기 쉽지만 한자로는 ‘득도(得度)’입니다. 조선시대 승려 신분증인 ‘도첩(度牒)’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신분증은 ‘천민 신분증’이었습니다. 승려는 갑오경장 이후, 실제로는 일제 강점기 이후에야 도성(서울) 출입을 허용받았을 정도로 차별받았습니다.
이런 탄압이 이어지다보니 조선 불교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나라 불교와 달리 사찰 내 승려의 역할을 나눈 것 같습니다. 경전 공부와 참선, 염불 등 수행의 맥을 잇는 스님[이판승]과 그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살림’을 뒷바라지하는 스님[사판승]으로 역할이 나뉘었다는 것이지요. 조선시대 사찰 살림을 맡은 사판승은 참 힘들었답니다. 종이 만들고 기름을 짜 관청에 바치며 사찰 살림을 이었답니다. 그 일이 하도 힘들어 절 주변에서 닥나무를 다 뽑아버리기도 했답니다. 원수 같은 닥나무를 없애버리면 종이를 만들지 않아도 될까 하는 생각에서 그랬겠지요.
그렇지만 이판과 사판을 구분하는 것은 불교 내부의 일이었을 뿐입니다. 승려가 된다는 것 자체가 천민이 된다는 뜻이었으니, 사람 대접 받기를 포기한다는 점에서는 이판이든 사판이든 마찬가지란 뜻에서 ‘이판사판’이란 말이 생겨났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이같은 한국적 상황에서 ‘막다른 데에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이라는 뜻이 생겨났다는 것이지요.
#대만은 ‘이판사판’, 중국은 ‘중생평등’
드라마 ‘더 글로리’는 넷플릭스를 통해 전세계에 방영되며 큰 인기를 끌었지요. 다른 나라 언어로는 한국 불교 용어 ‘이판사판’을 어떻게 옮겼을까 궁금해 인터넷을 검색해보았습니다. 과연, 우리나라 네티즌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미 영어, 일본어, 중국어 자막을 비교한 글이 즐비했습니다.
‘이판사판’이란 용어 자체가 한국적 불교 상황에서 나온 용어이다보니 중국어사전, 일본어사전에는 없답니다. 대만이나 홍콩에서 쓰는 번체자(繁體字) 자막은 따옴표를 치고 ‘理判事判’을 그대로 썼더군요. 우리말로 다시 옮기면 “뭐? 너 어른 됐다고 ‘이판사판’ 막나가네?” “‘이판사판’이야말로 불교용어거든”으로 번역했습니다. 대만과 홍콩 시청자들은 문맥으로 ‘이판사판’을 해석했을 것 같습니다. 대조적으로 중국 본토에서 쓰는 간체자(間體字) 자막은 ‘중생평등(衆生平等)’이란 단어로 옮겼네요. “너, 이제 우리가 컸다고 삶이 다 평등해졌다고 생각하는거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맞먹자는 거야?’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판사판’과 ‘중생평등’은 좀 뉘앙스가 다른 것 같네요.
#일본어는 ‘버리는 공양 그릇’
일본에서는 ‘이판사판’을 ‘捨(て)鉢(스테바치)’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원래는 ‘버리는 공양 그릇’이란 뜻에서 비롯됐다고 하는데 요즘은 ‘자포자기’란 뜻으로 쓰인답니다. 공양그릇[발(鉢)] 자체가 사찰의 밥 그릇을 가리키고 거기서 뜻이 바뀌었으니 역시 불교에서 나온 용어로 볼 수 있지요. ‘자포자기하고 막나간다’는 의미는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영어·불어는 욕설, ‘미쳤냐’로 의역
한자 문화권이면서 불교 전통도 있는 중국어와 일본어도 ‘이판사판’ 번역이 쉽지 않은데 하물며 서구어 번역은 더 어려웠겠지요. 영어는 의역을 택했더군요. 사라의 대사는 ‘똥(shit)’이나 ‘F’로 시작하는 욕설로, 동은의 대사는 “하나님의 집에서 그런 말 쓰면 안 돼(Don’t use that language in the house of God)”라고 번역했더군요. 프랑스어 번역도 영어와 비슷했습니다. 사라의 대사는 ‘너 미쳤어?(Tu t’en fous?)’로 옮겼습니다. 경건한 장소에서 저속한 말로 신성모독하지 말라는 뜻으로 의역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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