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의기술](100) 주민총회 속기록, 공개 안해도 합법… 16년 표류한 미아 재건축 사업 살려낸 법무법인 지평

김종용 기자 2023. 2. 8.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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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위, 조합장 고발… 벌금 100만원 이상 확정 시 직위 박탈
도시정비법 규정, 죄형법정주의 위반 주장…상고이유서 상단에 유사 판례 배치
”속기록·자금수지보고서 공개 대상 아냐” 파기환송… 벌금 90만원 확정, 직위 유지
서울의 한 재개발 지역 전경./뉴스1

“재개발·재건축 추진위원회(조합)가 있는 곳에는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있다”고들 말한다.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 사업’으로 불린 둔촌주공, 이른바 ‘한강 르네상스’를 이끈 서울 반포 아크로리버파크도 마찬가지였다.

전국 수사기관에는 조합과 비대위 간 고소·고발건이 끊이지 않는다. 대규모 아파트 재건축 조합이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지난해 둔촌주공을 비롯해 성북 보문5구역, 은평 대조 1구역 조합이 줄줄이 수사당국의 타깃이 됐다.

2000여 가구가 들어설 서울 강북구 미아동의 단독주택 재건축 사업 역시 조합과 비대위 간 법적 분쟁으로 내홍을 겪었다. 2006년 재건축추진위원회를 설립한 지 14년이 지난 2020년에야 겨우 조합 설립을 인가 받았는데, 사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조합과 비대위의 샅바 싸움 때문에 사업이 좌초될 위기까지 간 것이다. 재건축을 기다린 주민들의 오랜 염원은 결국 지난해 7월 대법원이 조합장의 혐의를 대부분 무죄로 판단한 후에야 실현이 가능해졌다.

◇조합-비대위 내홍… 고발전으로 이어진 샅바 싸움

미아동 단독주택 재건축은 오랜 시간 동안 진전 없이 표류했다. 2006년 4월 추진위가 설립됐으나 이후 조합 설립이 세 차례나 좌초됐다. 2015년 9월에는 토지 면적 3분의 2 동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조합 설립 인가가 반려됐다. A씨가 조합장으로 추대된 같은 해 12월에는 조합 창립 총회 개최 후 동의율 75.35%로 조합 설립 인가를 받았지만, 이 중 철회된 동의서 144건이 포함됐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2018년 3월 다시 취소 처분을 받았다. 이후 같은 해 11월 세 번째로 조합 설립을 신청했으나, 135명의 동의서에 문제가 있어 인가 신청 단계를 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정비사업 일몰제 적용 시기인 2020년 3월이 다가왔고, A씨는 조합 설립 인가를 네 번째로 신청해 극적으로 성공했다. A씨는 조합 설립 인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받은 동의서를 재사용한 문제로 비대위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갈등을 봉합하며 2020년 2월 조합 창립 총회를 개최해 80.63%의 동의로 설립 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팔부능선을 넘은 조합 앞에 또 다른 암초가 놓여 있었다. 비대위가 조합 설립 업무의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A씨를 도시정비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것이다. 조합 임원은 도시정비법을 위반해 벌금 100만원 이상의 처벌을 받을 경우 퇴임해야 한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고발 사실 대부분을 무혐의 처분했으나 ‘도시정비법상 자료 공개 의무 위반’에 대해서는 기소했다.

A씨는 2015∼2019년 작성된 주민총회 회의록과 의사록 등을 조합원, 토지소유자 등에게 15일 내에 공개하지 않은 혐의를 받았다. 도시정비법은 사업시행자에게 정비 사업 시행에 관한 일정한 서류(의사록, 사업시행계획서, 결산보고서 등) 및 이에 대한 ‘관련 자료’를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사건에서는 주민총회 및 조합설립총회 속기록과 자금수지보고서가 ‘관련 자료’에 해당되는지 여부가 쟁점이 됐다.

1심 재판부는 A씨에게 벌금 150만원을 선고했다. 자금수지보고서가 입·출금 세부 내역이나 결산보고서에 직접적 또는 불가분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없지만, 속기록은 도시정비법에 명시적으로 규정된 의사록과 불가분적으로 관련된 것이라는 취지다.

검찰과 A씨는 이 판결에 불복하면서 항소했고, 결과는 A씨에게 더 불리하게 나왔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단을 유지하는 한편 자금수지보고서도 ‘관련 자료’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결산보고서가 진정하게 작성됐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금수지보고서를 확인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는 의무 규정상 공개 의무가 있는 결산보고서의 관련 자료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해석”이라고 밝혔다.

원심 판결에 따라 조합장 직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A씨는 법무법인 지평의 정원(사법연수원 30기)·유현정(변호사시험 7회)·한선필(변호사시험 10회) 변호사를 새로 선임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지평은 원심에서 유죄 판단을 받은 속기록 및 자금수지보고서와 관련된 부분을 집중적으로 변호해 무죄 판단을 받아내기로 했다.

(왼쪽부터) 법무법인 지평의 정원, 유현정, 한선필 변호사./법무법인 지평 제공

◇”서울에서는 유죄, 부산에서는 무죄입니까”

지평은 형사법의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처벌 법규의 구성 요건이 명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도시정비법상 ‘관련 자료’의 해석에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평은 명시적인 공개 대상 서류와 직접 또는 불가분적으로 관련된 자료만을 도시정비법상 ‘관련 자료’로 해석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제시했다.

정원 변호사는 “도시 정비 사업 시행 과정에서 조합이 작성·수령·보관하는 서류의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점을 고려할 때, ‘관련’의 의미를 엄격하게 해석·적용하지 않으면 예측 가능한 범위를 넘어 지나치게 처벌 대상이 확장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지평 변호인단은 그 다음으로 속기록에 대한 원심 판단을 깨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이때 지평은 이른바 ‘콤팩트디스크(CD) 판례’를 찾아냈다. 앞서 대법원은 2015년 이사회 ‘녹취파일’이 도시정비법상 관련 자료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린 적이 있다. 당시 녹취파일이 CD에 저장돼 CD판례라는 별칭을 갖게 됐다.

유현정 변호사는 “녹음 자료를 문자화해 기록한 문서인 속기록을 녹음 자료와 다르게 취급할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지평은 ‘심리불속행 기각’을 피하기 위해 이 판례를 상고이유서 상단에 배치하기도 했다. 심리불속행은 앞선 판결에 중대한 법령 위반 등 특별한 사유가 없을 경우 대법원이 별도 심리를 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다.

다만 자금수지보고서와 관련해서는 대법원의 판례가 없었기 때문에 원심에서 유죄로 인정한 논리를 깨야만 했다. 원심은 서울특별시의 클린업시스템 운영지침를 근거로 자금수지보고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판결했는데, 이 지침은 ‘자금수지보고서는 작성일, 분기자금 수입 지출 내역, 분기말 차입금 현황 등을 필수 요약 항목으로 하고 의무적으로 15일 이내에 공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평은 서울시의 클린업시스템처럼 정비사업관리시스템이 설치된 곳이 부산과 대전, 광주광역시 등 4개 지방자치단체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그 중에는 시스템을 통해 정보를 공개하도록 의무화한 곳(서울시, 광주시)이 있는 반면 단지 권고만 하는 지자체(대전시)도 있었고, 정보 공개와 관련한 규정이 전혀 없는 지자체(부산시)도 있었다.

정 변호사는 “해당 조례는 원칙적으로 정비사업관리시스템 운영 방법 등에 필요한 사항을 정하도록 위임 받은 것일 뿐 도시정비법상 관련 자료를 정한 뒤 위반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수권을 받아 마련된 것이 아니다”라며 “원심 판단에 따르게 되면 서울에서 공개를 안 하면 유죄고, 부산에서 공개 안 하면 무죄가 된다”고 강조했다.

결국 대법원은 지난해 1월 27일 “속기록과 자금수지보고서는 도시정비법상 관련 자료가 아니다”라며 벌금 15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북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같은 해 7월 8일 열린 파기환송심도 대법 판결에 따라 속기록과 자금수지보고서 공개 의무 위반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회의자료와 의사록 공개 의무 위반 혐의만 인정됐고, 벌금 90만원이 선고됐다.

이 판결에 따라 조합장 직위를 지키게 된 A씨는 추진위 설립 16년 만에 사업 시행 인가를 신청했다. 강북구청은 심의를 거쳐 최종 인가를 확정할 방침이다. 해당 구역은 미아뉴타운에서도 대규모 사업지로 꼽히는 곳이다.

한선필 변호사는 “관련 자료의 범위에 따라 조합 임원의 형사 책임 성립 여부와 처벌 정도가 달라질 수 있고, 이에 따라 조합 임원 지위 여부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결과가 중요했다”며 “자금수지보고서가 ‘관련 자료’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 대법원이 처음으로 판시한 사건인 만큼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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