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약을 줄이자고 하는 주치의
시작은 갱년기 증상이었다. 50대 여성은 월경이 멎으면서 점차 식은땀이 나고 두근거리는 증상이 나타났는데, 특히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의료기관에 가서 호소를 하고, 두근거림을 멈추게 하는 베타차단제(BB)를 처방받았다. 두근거리는 증상은 좋아졌지만 베타차단제를 복용하면서 기관지가 좁아져 쌕쌕거리기 시작했고, 또 다른 의료기관을 찾아가 천식을 진단받았다.
시작은 혈압이었다. 70대 여성은 혈압이 높아 의료기관에서 혈압약 칼슘채널차단제(CCB)를 처방받았다. 혈압은 잘 조절되기 시작했지만, 어느 날부터 양쪽 다리가 점점 붓기 시작했고, 이에 이뇨제가 처방되었다. 이뇨제를 드시니 다리의 부기는 빠졌지만 화장실 가는 횟수가 너무 늘었고, 밤에 자주 깨서 화장실을 가게 되니 다른 의료기관에서 요실금에 쓰는 항콜린성 약제를 처방받았다. 항콜린성 약제 복용 이후 낮에도 졸리고 인지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이제는 치매 검사를 받아야 하나 걱정하는 상태가 되었다.
약의 부작용을 약으로 해결하려고 하면서 부작용이 더 심해지고 전신적인 상태가 악화되는 일들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특히 주치의가 없는 분들, 여러 의료기관을 다니는 분들일수록 이런 일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니 드시는 모든 약들을 꼼꼼히 살펴, 중복되는 약을 빼고, 상충되는 약을 피하고, 부작용이 나타난 약들을 줄이고, 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추가된 약들도 골라내야 하는 것이 주치의의 역할이다. 마치 탐정 같다.
다약제 관리를 위해 약을 조정하는 건 정말 중요한데, 우리의 문제는 뭔가 뚜렷한 계기가 없이 이 작업을 시작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주치의 관계를 꾸준히 맺어왔던 환자들이라면 신뢰하는 내 주치의가 약을 조정해보자고 하니 선뜻 동의할 수 있다. 당연히 환자인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자는 거라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주치의 관계를 꾸준히 맺어온 환자들은 이런 다약제 관리가 애당초 필요하지 않은 이들인 경우가 많다. 꾸준한 관계 속에서 웬만큼은 약들이 교통정리가 되어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계속 진료해왔던 환자의 약을 갑자기 줄인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렇게 줄일 약이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방문의료를 통해 처음 만나는 환자들의 약을 살펴보는 일은 의미 있다. 여러 병원에서 타서 드시는 약을 모두 꺼내어 평가할 수도 있거니와, 실제로 잘 드시는지 아닌지 남아 있는 숫자까지도 세어볼 수 있다.
우리 재택의료팀에서도 방문의료를 할 때 “약은 시작하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얘기를 매일 되새긴다. 어떤 증상이 나타나면 최근에 새로 시작한 약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원인이 될 법한 약을 탐정처럼 찾아내서 보호자에게 이 약이 증상의 원인인 것 같으니 빼자고 한다. 수년째 똑같은 약을 드셨으니 이 약이 원인일 리 없다는 보호자들도 있다. 하지만 수년째 전신적인 상태가 점점 나빠져 왔는데도 약이 똑같이 유지되었다면, 상대적으로 약의 용량이 많아진 셈이 아니겠는가? 우리를 믿어주면 다행이지만, 대학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우리 같은 동네 의사들이 빼라 말라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의 보호자들도 만만치 않게 많다. 나도 알고 있다, 첫 만남에서 바로 신뢰를 얻어내기 쉽지 않다는 것을.
주치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면 약 조절이 훨씬 수월한 것은 사실이다. 설명과 설득에도 시간이 덜 걸린다. 그러나 다약제 조정을 통하여 진정한 주치의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관계의 진전은 시간이 흐른다고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부드러운 곡선처럼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관계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계로 도약하는 건, 질적인 전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약제 조정은 그런 전환의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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